항목 ID | GC04203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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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樂浪郡과-交流 |
영어의미역 | Exchanges with the Nangnang Commendary during the Three Han State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이재현 |
[정의]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정치 세력과 낙랑 군현과의 교류.
[개설]
기원전 108년 한(漢)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평양 일대에 세운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될 때까지 중국과 한반도, 일본을 연결하는 정치·경제적 거점 구실을 하였다. 한반도 남부 지역의 변한과 진한도 낙랑을 통해 한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고 발달된 철기를 수출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영남 지역에서 한식 유물(漢式遺物)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은 금호강과 낙동강 유역, 남해안 일대의 교통로상에 위치한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전한 시기의 거울, 동전, 말 갖춤새 및 수레 부속구, 무기류 등이 출토된다. 후한 이후의 유물은 거의 출토되지 않고 위(魏)와 진(晋)에서 사여한 관인(官印) 정도만 출토될 뿐이다.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김해, 창원, 밀양, 남해안 연안에서 전한 시기의 동전과 거울, 허리띠 고리, 토기류와 장신구 등과 후한 시기 이후의 유물도 출토되고 있다. 특히 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良洞里古墳群)과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천면 대대리 고분(大垈里古墳) 유적에서는 낙랑 지역에서도 드물게 출토되는 구리 솥[靑銅鼎]이 출토되었다. 그중에서 김해 양동리 고분군 322호 묘에서 출토된 구리 솥에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한나라 궁정에서 사용한 물품으로 밝혀졌다.
[사료에 나타나는 한반도 남부와 낙랑군의 교류]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과 『후한서(後漢書)』 등에는 당시 남부 지역의 세력이 낙랑과 교섭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지황(地皇) 연간[20~23]에 진한의 우거수 염사치(廉斯鑡)가 낙랑과 교섭하는 내용에서는 육로(陸路)와 해로(海路)가 모두 이용되었고, 한어(漢語)를 사용하는 전문 세력이 있었다는 점, 노예[生口]와 변한 포가 공물로 사용된 점 등이 전한다. 그리고 염사읍(廉斯邑) 군(君)인 소마시(蘇馬諟) 등이 조공을 바친 내용도 있고, 변진의 철이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 수출되었던 상황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남부 지역의 여러 정치 세력들은 조공은 물론 전문 상인에 의해 낙랑과 활발한 교역 활동을 하였는데, 그를 통해 중국이나 낙랑의 위세품뿐만 아니라 야련 기술과 토기 제작 기술 등의 선진 기술이 전래되었다. 또한 여러 통치 기술이나 행정 체계, 매장 관습, 예제 등의 사회적 규범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독로국과 낙랑군의 교류]
독로국(瀆盧國)이 있던 부산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한이나 낙랑의 물품이 출토된 적이 없어 낙랑군과의 구체적인 교류 내용을 알기 어렵다. 다만 기장군의 방곡리 유적(芳谷里遺蹟) 가-1호 구덩무덤에서 출토된 쇠 단검의 놋쇠 손잡이는 평양 부근 출토품과 형태가 같아 상호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