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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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韓時代-瀆盧國-狗邪國-關係 |
영어의미역 | Relations with Dongno-guk and Guya-guk during the Three Han States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삼한 시대 부산 독로국과 김해 구야국의 문화 공유와 금관가야 연맹 형성 관계.
[개설]
한(韓)으로 총칭되는 삼한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며, 한반도 남부에서 국(國)이 발생하는 시기에 해당된다. 진한·변한은 삼한 시대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던 정치체(政治體)의 총칭으로 앞 시기의 청동기 사회를 토대로 중국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점토대 토기 문화, 다뉴경(多鈕鏡) 같은 청동기 문화, 전국계(戰國系) 철기 문화 등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회를 성립하였다.
1. 구야국
중국의 사서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지금의 영남 지역에는 진한과 변한이란 사회가 있었으며, 여기에는 24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때의 나라는 지금의 군 정도의 크기이며, 여러 읍락 중에서 중심 읍락[國邑]과 주변 읍락으로 이루어진 정치체이다. 24개의 나라 중에는 규모가 큰 나라[大國]와 작은 나라[小國]로 구분되었는데, 김해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구야국(狗邪國)은 변한을 대표하는 대국이었다.
구야국은 바다와 접한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이점을 활용하여 낙랑-마한-구야국-왜로 연결되는 대외의 중개 교역으로 성장하였다. 중개 물품은 당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철을 비롯하여 소금·광물·칠기(漆器)·문방구·포 등 각종 특산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개 교역을 주도한 주수층(主帥層)은 교역을 통하여 얻은 부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한경(漢鏡)[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본뜬거울[倣製鏡] 등의 사치품을 소유하였다.
2. 독로국
그리고 낙동강 동쪽 기슭의 온천천 일대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다수 집단이 거주하면서 부산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이후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동래 일대에 기반을 둔 집단이 중심 집단으로 부상하여 온천천과 수영강 일대의 집단을 통합한 국이 성립하였는데, 『삼국지』 변진조에 등장하는 독로국(瀆盧國)이 이곳으로 비정된다. 한때 독로국의 위치를 거제도로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거제도에 삼한 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의 고분도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거제도에 국이 존재할 가능성은 낮다.
온천천 수계(水系)에는 청동기 시대 유적이 다수 존재할 뿐만 아니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과 수안동 일대에 분포하는 대규모의 생활 유적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 온천동 이중 환호(溫泉洞二重環濠), 온천동 목관묘(溫泉洞木棺墓),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의 널무덤군, 노포동의 널무덤과 덧널무덤군 등 삼한 시대의 유적도 다수 존재한다. 이 중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부산 동래 패총(釜山東萊貝塚)은 동래 일대의 중심 집단의 유적이다. 5세기 후반에는 온천천 남쪽에 고총 및 고분으로 이루어진 연산동 고분군(蓮山洞古墳群)이 조영되었다. 따라서 『삼국지』 변진조에 등장하는 독로국은 현재의 동래 일대로 비정된다.
[유물에 나타난 독로국과 구야국의 문화 교류]
3세기 후반 이전까지 김해·부산 지역의 분묘에 부장된 유물은 철기가 많고, 토기의 양은 많지 않다. 부장된 토기의 종류로는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화로 모양 토기[노형 토기(爐形土器)]·두 귀 달린 곧은 목 항아리[양이부직구호(兩耳附直口壺)]·굽다리 입 큰 항아리[대부광구호(臺附廣口壺)]·굽다리 곧은 목 항아리[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 등이며, 기종 조성이 다양하지 않다. 부장 토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목 짧은 항아리는 높이보다 너비가 넓은 횡타원형이며, 와질제(瓦質製)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목 짧은 항아리 다음으로 많이 부장된 화로 모양 토기는 대형·중형·소형 등 크기가 다양하다. 두 귀 달린 곧은 목 항아리에는 판상(板狀)의 귀를 상하로 붙이고 좌우로 둥근 구멍을 뚫은 기형과 판상의 귀를 좌우 방향으로 붙이고 상하로 둥근 구멍을 뚫은 기형으로 구분되며, 양자 모두 둥근바닥이다.
굽다리 입 큰 항아리에는 몸통에 꼰무늬[繩文] 또는 평행 타날(打捺) 후 횡침선을 돌린 기형과 몸통에 상하로 1줄씩 여러 줄을 그은 밀집 종집선문대가 상하 2단 또는 1단으로 구성된 기형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김해·부산 지역에만 분포하는 특징적인 기형이며, 후자는 부산 노포동 분묘군에서 주로 출토되고 김해 지역에는 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良洞里古墳群) 235호·453호 묘에서만 출토되었는데 경주·울산 지역의 대부광구호와 상통한다.
그리고 부산 동래 패총에서는 많은 양의 와질 노형 토기가 출토되었으며, 기형과 무늬의 종류 등에서 경주·울산 지역 노형 토기와 유사한 점이 많고 낙동강 서쪽 지역의 생활 유적에서 와질 굽다리 접시[高杯]가 출토되지 않는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부산 동래 패총에서는 경주·울산 지역에 분포하는 와질 고배와의 유사성이 많은 고배도 출토되는 등 경주·울산과 동래 사이에는 활발한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특히 동래 지역은 진한계 유물과 변한계 유물이 혼재해 있으며, 진한권 문화를 변한권으로 전달하는 구실을 하였다.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형성된 김해·부산 지역의 조개더미와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연질·와질·도질 등이 있으며, 연질제가 80% 이상으로 연질 토기가 일상생활 용기로 애용되었다. 연질제의 일상 용기로는 옹(甕)·호(壺)·시루·완(宛)·노형 토기·부형 토기(釜形土器) 등이 있다.
4세기에 진입하면서 화로형 토기의 크기가 커지고 원형의 손잡이가 달리며, 호가 안에 놓이면서 기대(器臺)[그릇 받침]로 바뀌게 된다. 손잡이가 달리고 호를 놓은 기대로서의 화로형 토기는 김해·부산 지역에만 분포하고, 이외 지역에는 분포하지 않는 전형적인 금관가야 양식 토기의 하나이다. 이 손잡이 달린 화로형 그릇받침[파수부 노형 기대(把手附爐形器臺)]가 4세기 초부터 김해와 부산 지역의 주거지와 조개더미, 분묘에서 출토되어 양 지역 집단 간에 생활 및 매장 문화를 공유하였음을 나타낸다.
손잡이 달린 화로형 그릇받침과 더불어 무늬 없는 도질의 둥근바닥 또는 납작바닥 목 짧은 항아리, 닭 벼슬 모양의 귀가 붙은 목 짧은 항아리도 부산·김해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4세기 후반이 되면, 굽다리 접시·목 짧은 항아리·화로형 토기·뚜껑있는 굽다리 곧은 목 항아리[유개 대부직구호(有蓋臺附直口壺)]·통형 기대 등 전형적인 금관가야 양식 토기가 성립하고 김해·부산 지역에만 집중 분포한다.
변한의 대국인 구야국은 주변 지역을 흡수 통합하거나 인접한 지역의 지배 집단과 연맹을 맺어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광역에 걸친 정치체로 발전하였는데, 구야국이 확대 발전된 정치체가 금관가야이다. 구야국은 낙동강 이동의 독로국과 연맹을 맺어 지지 기반을 두텁게 하고, 4세기 후반에 진영과 창원 분지, 진해·마산만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각 집단을 통합하였다.
금관가야의 최상층은 규모가 큰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갑옷·투구·고리 자루 큰 칼[環頭大刀]·통형동기(筒形銅器)·덩이쇠[鐵釘] 등 진귀한 물품을 부장하고 순장하였다. 그 아래의 집단은 최상층보다 다소 격이 떨어지는 유물을 부장하였으며, 이보다 더 아래의 집단은 토기와 간단한 농기구·공구류를 부장하고, 각 소하천과 해안에 위치하면서 금관가야의 토대를 이루었다.
[묘제에 나타난 독로국과 구야국의 문화 교류]
김해·부산 지역의 덧널무덤은 3세기 후반까지 묘광의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깊이가 얕고 유물은 피장자의 머리맡에 철기, 발치 쪽에 토기를 부장한 양상은 김해·부산·울산·경주 지역 덧널무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이르면,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대형 덧널무덤은 크기[너비와 깊이]가 다른 두 개의 목곽을 만들어 큰 것은 주인공을 안치한 주곽으로, 작은 것은 부장품을 넣은 부곽으로 한 창자형(昌字形)의 주곽·부곽식 덧널무덤을 조영하였는데, 이것을 김해형 덧널무덤이라 한다.
그리고 경주 지역은 너비에 비해 길이가 긴 세장한 평면 형태의 묘광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주곽과 부곽을 구분한 일자형 목곽이 조영하였는데, 이것을 경주형덧널무덤이라 한다. 덧널무덤의 구조와 형식에서 김해·부산 지역과 경주 지역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모습은 이 시점을 시작으로 해서 각각의 지역에 존재한 집단 사이에 무엇인가 차이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김해·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주곽·부곽식 덧널무덤의 묘형(墓形)은 일자형이지만, 부곽의 배치는 횡장방형·종장방형, 하나의 묘광에 바닥 깊이를 달리하여 주곽과 부곽을 구분한 형태로 나뉜다. 횡장방형은 대성동·양동리·칠산동 고분군 등 모두 김해 지역에 위치한다. 횡장방형의 부곽은 주곽보다 규모가 훨씬 작기 때문에 부장품만 부장하고, 순장자는 주곽에 매장하였다. 종장방형은 낙동강 동쪽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특징적인 묘형이다.
부곽 규모가 주곽의 규모보다 작지만, 길이가 5~6m에 이르기 때문에 부장품과 순장자가 매장되기도 한다. 주곽의 바닥 중앙부에 끈으로 엮은 덩이쇠를 놓고 그 위에 주검을 안치하였다. 종류는 다르지만, 바닥에 유물을 까는 형태는 경주 지역의 쇠투겁창[鐵鉾]을 까는 형태와 상통한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덧널무덤은 바닥 전면에 편평한 돌을 한 벌 깔았으나, 부산 복천동 고분군의 덧널무덤은 목곽 안쪽의 양쪽 가장자리가 높고 가운데가 낮은 단면 형태가 U자형이다.
금관가야 양식 토기의 특징적인 기종의 하나이자 김해와 부산 지역의 집단이 공통된 토기 문화를 소유하였음을 나타내는 자료가 아가리가 밖으로 심하게 꺾이는 외절 구연 고배(外折口緣高杯)와 통형 동기이다. 외절 구연 고배는 4세기 후반 초에 김해 대성동 고분분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처음 나타나고, 말에 동으로는 기장군의 고촌리 고분군(古村里古墳群), 서로는 창원시 웅천 패총(熊川貝塚)·창원 가음정동 고분군(昌原加音丁洞古墳群)·창원 도계동 고분군(昌原道溪洞古墳群)에까지 분포한다. 외절 구연 고배는 호나 옹 등 여타의 토기와 달리 분포 범위가 명확하게 나타나는 매우 특징적인 유물로 같은 시기의 울산·경주·함안·창녕·밀양 등의 유적 또는 유구(遺構)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외절 구연 고배와 함께 금관가야의 특징적인 유물이 통형 동기이다. 통형 동기는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전(傳) 함안 사도리 출토품, 수집품 등과 일본 각지의 고분 출토품 등이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통형 동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6기-16점], 김해 양동리 고분군[8기-16점], 부산 복천동 고분군[5기 10점], 김해 망덕리 고분군[1기 1점] 등에서 43점 출토되었고, 수집품 16점, 그리고 전 함안 사도리 출토품 1점 등 모두 59점이다. 통형 동기가 출토된 유적이 대성동·양동리·복천동 고분군, 망덕리 고분군뿐이기 때문에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은 17점은 김해 또는 부산 지역에서 출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통형 동기의 분포는 매우 제한적이다.
통형 동기는 4세기 전반부터 5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1호 묘에서는 8점이 출토되었고, 39호 묘에서는 대형 묘가 아닌데도 2점이 출토되었다. 반면 부산 복천동 고분과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많아야 3점이고, 대부분 2점 또는 1점이 기본이다. 개별 고분에서의 출토 양과 단위 고분군의 전체 출토 양이 많고, 다양한 형식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대성동 집단에서 제작하여 금관가야의 핵심 세력인 복천동과 양동리 집단에 배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위세품의 분여를 통한 지배 방식의 맹아적 형태이다.
4세기 대의 김해와 부산 지역은 주곽과 부곽을 배치한 김해형 덧널무덤과 손잡이 달린 화로형 토기[파수부 노형 토기(把手附爐形土器)]·외절 구연 고배·뚜껑있는 굽다리 곧은 목 항아리[유개 대부직구호] 등의 기종과 동일 형식의 토기와 통형 동기를 공유하는 등 강한 관계성을 나타낸다.
[의의와 평가]
김해와 부산 지역의 묘제와 유물에 나타나는 공통성은 김해와 부산 지역의 집단 간에 강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고 긴밀한 정보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공통된 생활 문화권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특정 기종의 소멸 또는 형태 및 기능 변화가 국한된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것, 그것은 그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지역의 집단들 간에 유대 관계 또는 공통된 이념을 표방하는 정치체의 성립, 곧 금관가야의 성립을 의미한다. 금관가야는 낙동강 서쪽 기슭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동쪽 기슭의 독로국과의 연맹을 맺어 이루어졌음이 이 시기의 물질 자료를 통해 유추할 수 있다. 금관가야는 4세기 후반에 번성기를 누렸으나 5세기 초 이후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명맥만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