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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시대의 북방과의 교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249
한자 三韓時代-北方과-交流
영어의미역 Exchanges with the Northern Nations during the Three Han States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홍보식

[정의]

삼한 시대 변한·진한과 중국 동북 지역 북방 민족과의 교류.

[개설]

삼한 시대의 변한·진한의 각 집단은 주변 집단과 활발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특히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인 랴오닝 성[遼寧省]과 지린 성[吉林省] 일대의 북방 민족과도 교류 관계를 유지하였다.

[삼한 시대의 국제 교류]

현재 낙동강 하류 지역에 삼한의 국(國)이 언제 성립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이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쇠퇴하고 철기 문화가 수용되어 정착하는 기원전 2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1세기 전반에 태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2세기 말에 한사군이 한반도 서북부와 랴오닝 성 및 지린 성 등 중국 동북 지역에 설치되면서 이 지역에 큰 정치·사회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이후 기원전 2세기 말에 대동강 유역에 설치된 낙랑을 중간 거점으로 삼아 중원 대륙~북방~낙랑~마한~진한·변한을 연결한 국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교류는 한강~낙동강을 연계한 내륙 경로와 서해안~남해안으로 이어지는 연안 경로가 개척되었다. 두 경로는 비슷한 시기에 개척되었지만, 기원전 1세기 전반까지는 내륙 경로가 더 중시되었다.

기원전 1세기 후반 이후부터 남해안의 섬과 해안 지역의 유적에서 외래계 유물의 수량이 증가한다. 사천 늑도 유적(泗川勒島遺蹟)에서는 토기와 오수전(五銖錢) 등의 낙랑 유물과 야요이[彌生]계 토기 등의 외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해로를 이용한 국제 교류의 중간 기착지로서의 모습을 보여 준다. 부산·김해 지역은 육로를 이용하든 해로를 이용하든 일본 열도로 가는 대륙의 출발지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부산·김해 지역의 독로국구야국은 해안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해양을 통한 대외 교류에 의존해 성장하였다.

삼한 시대에는 낙랑·마한·왜와 빈번한 교류 관계가 이루어졌는데, 그 흔적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출토된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청동 거울·청동 솥[銅鍑]·철 솥·금박 유리구슬 등의 중국제 유물, 손잡이가 달린 청동 솥·호형 대구(虎形帶鉤)[호랑이 모양의 청동제 허리띠 걸쇠]·마형 대구(馬形帶鉤)·재갈 등의 북방 유물, 광형 동모(廣形銅矛)·본뜬거울[倣製鏡]·야요이 토기 등 왜[특히 규슈 지역]의 유물, 와질 항아리 등의 금강 유역[馬韓系]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부산·김해 지역의 삼한 시대 분묘에서 중국 동북 지역에 주 분포권을 보이는 북방계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북방계 유물을 통해 본 지역 교류]

북방계를 보여 주는 대표적 유물이 청동으로 만든 솥이다. 청동 솥은 북방 유라시아 일대에 거주한 유목 민족이 사용한 취사 용기로 서주 만기(西周晩期)에 처음 등장한 후 위진 남북조 시기까지 사용되었다. 청동 솥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 29·47호와 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良洞里古墳群) 235호 묘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고, 이외에도 출토지를 알 수 없지만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1점이 소장되어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김해 양동리 고분군 235호 묘에서 출토한 청동 솥은 두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29호 묘 출토품은 몸통이 길쭉하고 최대 지름이 귀 아래에 위치하며 귀의 끝 단면이 삼각형이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47호 묘와 김해 양동리 고분군 235호 묘 출토품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29호 묘 출토품보다 크기가 작고 최대 지름이 몸통 위쪽에 위치하며 귀의 단면이 얇고 편평하다. 이와 같은 형식의 청동 솥은 내몽골과 지린 성, 후베이 성[湖北省]·허난 성[河南省]·랴오닝 성 등 중원과 중국 동북 지역 등 꽤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 출토한 3점의 청동 솥의 시기는 3세기 후반인데, 이 시기에 청동 솥이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반입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었다. 3세기 말에 부여족이 김해 지역으로 이주할 때 반입되었다거나 고구려와 교섭 또는 영향, 낙랑과의 교섭 과정에서 이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삼한의 국읍 지배층인 거수(渠帥)·신지(臣智) 등이 착용한 물품으로서 호형 대구와 마형 대구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시기의 허리띠 고리[대구(帶鉤)]는 천안·청주·충주 등지의 충청도, 대구·경산·영천·경주 등지의 경상북도 남동부, 김해 지역 등지의 널무덤[목관묘(木棺墓)]와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에서 출토되었다. 마형 대구는 호형 대구보다 출토된 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분포 범위도 넓어 입수가 쉬워 선호하였을 개연성이 있고, 중원 지역에서 생산되어 낙랑을 통해 삼한으로 반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형 대구는 중국 동북 지역[현 랴오닝 성·지린 성·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 주로 분포하는데 북방 유목 민족이 패용한 유물이다. 삼한 시대부터 말의 사육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말을 제어하는 마구의 하나인 재갈이 나타난다. 이 시기의 재갈은 대부분 표비(鑣轡)[말갖춤]인데, 이 표비는 북방 유목 민족이 개발한 것으로 부산·김해 지역의 분묘에서 출토된다. 시기는 늦지만,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 무덤에서 출토한 표비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3세기 후반 부산·김해 지역에서 도질 토기의 등장, 순장·후장·오로도스형 청동 솥, 보요부 금동관(步搖附金銅冠)[보요(步搖)는 걸을 때마다 흔들리도록 한 장식], 묘제 분화, 선행 분묘의 파괴 등이 거의 동시에 진행되면서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배후에 부여족이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이주한 결과로 보기도 하였다. 이 중 오로도스형 청동 솥은 중국 동북 지방을 포함한 북방 유물이지만, 그 이외의 요소에 대해서는 자체적인 사회 변화에 수반하여 나타난 양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북방계 유물이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들어오게 된 배경과 경로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교류 관계 또는 주민 이동설과 낙랑 등 서북한[청천강~대동강] 지역을 통한 간접적인 접촉설 등이 제시되어 있다.

다른 시기, 특히 초기 철기 시대 또는 삼국 시대의 주변 지역과의 교류 산물의 양상과 비교할 때, 기원 전후부터 3세기 후반까지에 해당하는 낙동강 하류 지역의 외래계 유물에서 북방계 유물이 출토한 유구 및 수량은 매우 적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시기에 일본 열도계 유물이 출토한 유구와 수량이 훨씬 많은 점과 비교할 때, 북방 지역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미미하고 낙랑 등이 있는 서북한 지역을 통한 간접 교류 관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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