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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92
한자 三韓時代
영어의미역 The Three Han stat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배진성

[정의]

삼한 시대 부산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한 시대(三韓時代)[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경]라는 시대 명칭은 주로 문헌 사학(文獻史學)에서 사용되어 왔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 문헌 자료만으로는 삼한 시대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최근 부산을 비롯한 영남 지역에서 삼한과 관련된 고고학적 발굴 조사 및 연구 성과가 크게 진전되면서 삼한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새롭게 재검토되고 있다.

삼한 시대의 대표적인 고고학적 자료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청동 거울[銅鏡]·청동 창[銅戈·銅矛]을 비롯한 각종 청동 의기(靑銅儀器)[제사나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 토기의 아가리 부분에 원형 혹은 삼각형의 점토 띠를 덧붙인 점토대 토기(粘土帶土器), 무덤에 부장되는 검은 간 토기[黑色磨硏土器·黑陶長頸壺], 굽다리 접시 모양 토기[豆形土器], 철기의 출현 및 보급, 와질 토기(瓦質土器)를 비롯하여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이라는 새로운 묘제(墓制)의 출현을 들 수 있다.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삼한 시대 유적으로는 구서동 유적, 노포동 유적, 부산 동래 패총, 조도 조개더미 등이 있다.

[삼한 시대의 시기 구분]

삼한 시대의 시기 구분은 크게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 나누어지며, 그 속에서 각기 전반(前半)과 후반(後半)으로 구분된다. 전기 전반은 원형 점토대 토기, 검은 간 토기, 세형동검과 함께 널무덤이 나타나는 시기로 기원전 4~3세기에 해당한다. 널무덤에서는 청동 거울·나팔 모양 청동기[喇叭形銅器]·방패 모양 청동기[防牌形銅器]·청동 방울[銅鈴] 등이 출토된다. 이러한 널무덤과 토기 및 청동기들은 중국 동북 지방의 영향, 구체적으로는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일대에 살던 주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혀지고 있다.

전기 후반은 삼각형 점토대 토기를 표지(標識)로 하는 시기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하며 철기 보급이 늘어나 무덤에도 철기가 부장되기 시작한다. 전기 전반의 널무덤은 집단적이지 않고 단독으로 조성되는 데 비해, 전기 후반에는 여러 기가 한 지역에 군집(群集)하는 특징이 있다.

후기 전반은 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 중반으로 경주·김해 지역까지 널무덤이 확산되고, 동시에 낙랑(樂浪) 등과의 대외 교류가 활발해진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고고학적 현상으로는 와질 토기(瓦質土器)[낙랑 토기의 영향을 받아 밀폐된 가마에서 구운 것으로 회백색을 띠는 영남 지역 특유의 토기]의 출현을 들 수 있다.

후기 후반은 기원후 2세기 후반~300년경으로 널무덤에서 덧널무덤으로 바뀌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덧널무덤의 출현과 함께 무덤 규모가 월등히 커지고 그에 따라 부장품의 양과 질에서도 무덤 간 격차가 심해져 사회의 계층화가 뚜렷하게 반영된다. 부산 지역에서는 삼한 시대 후기의 유적과 유물이 주로 확인된다.

[삼한 시대의 시작 연대]

삼한의 시작에 대해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체로 기원 전후한 시점부터로 인식되어 왔지만,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늘어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고고학계에서는 기원전 300년과 기원전 1세기로 하는 두 가지 견해가 나타나게 된다. 먼저 기원전 300년으로 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위만(衛滿)에게 쫓겨 좌우 관인(左右官人)을 거느리고 한(韓)의 땅으로 와서 스스로를 한왕(韓王)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역사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한(韓)’으로 기원전 2세기 초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이 연대가 곧바로 ‘한’, 즉 삼한의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의 기사는 당시 한반도 남부가 ‘한’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알려져 있었음을 보여 줄 뿐, ‘한’ 혹은 ‘삼한’의 시작 연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원전 2세기 초 한반도 남부 사회의 대표적 고고학 자료인 세형동검이나 점토대 토기 등이 처음 출현하는 때는 대략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점이다.

이때부터 기존에 고인돌[支石墓]을 축조하던 사회에서 널무덤을 비롯한 새로운 무덤 양식과 도구로 대표되는 사회로 들어서기 때문에 삼한의 시작도 기원전 300년을 전후한 시점이라는 견해이다.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에 진입하는 시점으로 삼한 시대의 시작은 곧 한반도에서 철기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음으로 기원전 1세기부터 삼한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를 보면, ‘한’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마한·변한·진한이 정립된 시기는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라고 한다. 더불어 이 시기의 고고학적 특징으로서 와질 토기의 등장과 철기의 보편화 등을 중시한다.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삼한의 시작을 기원전 300년경으로 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러한 배경에는 최근 영남 지역의 활발한 고고학적 발굴조사 및 연구 성과의 축적이 있다. 영남 지역에는 진한과 변한이 있었으며, 부산·경상남도는 변한 사회에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부산 지역에는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 있었는데, 철 소재를 매개로 하여 낙랑군이나 일본 열도의 왜와 교류하면서 성장 발전해 갔다.

[고고학적 시대 구분과 삼한 시대]

고고학의 시대 구분은 도구의 재질에 따른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라는 가장 근본적인 구분에서 출발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세계 여러 지역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나름의 시대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 고고학 개설서에는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초기 철기 시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에 대해서는 용어의 적절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적지 않고, 삼한 시대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 명칭으로서 새롭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고고학계에서 삼한 시대를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로 보는 견해는 물론 삼한 시대라는 시대 명칭 자체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한 견해의 주요 내용을 보면, 기원전 3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한’이 있었다고 해도 이때는 아직 마한·변한·진한이라는 삼한 병립 단계가 아닐 가능성이 있고, 또 북쪽에는 1세기에 이미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기 때문에 원삼국 시대 대신 삼한 시대를 사용할 경우 한반도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남한에 한정된 시대 명칭에 그친다고 한다. 이러한 약점 때문에 삼한 시대보다는 기존의 시대 명칭에 따라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3세기~2세기]와 원삼국 시대[기원전 1세기~기원후 3세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에 대해 삼한 시대를 사용하는 고고학자들의 주요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초기 철기 시대는 이미 철기가 상당히 보급되어 완전한 철기 시대에 들어섰으므로 초기 철기 시대로 부르는 것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원삼국 시대는 삼국 시대의 원초기(原初期) 또는 원사(原史) 단계의 삼국 시대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런데 기원후 1세기에 북쪽에는 이미 고구려가 성립되어 있어 원사가 아닌 역사 단계인 반면, 한반도 남부는 신라·백제 이전의 삼한 단계에 해당한다. 고구려와 삼한의 공통점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1~3세기의 한반도 전체를 원삼국 시대라는 동일한 시대 명칭으로 묶기보다는 고구려와 그 이남의 삼한으로 구분하는 것이 한반도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더 유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존의 초기 철기 시대와 원삼국 시대를 합하여 삼한 시대로 하자는 의견이 1990년대 중반부터 부산 지역의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주장되어 왔다.

이와 같이 세부적으로는 고고학적 자료의 획기(劃期)를 어디에 두는가 혹은 무엇을 가장 큰 기준으로 하는가에 따라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축조 사회가 끝나고 철기의 출현을 동반하는 널무덤 축조 사회로의 진입이 시대 구분의 지표가 됨은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어떠한 시대 명칭을 사용하든 한반도 남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분명하다. 기원후 4세기 전후에 이르면 독로국은 김해 구야국(狗邪國)과 연맹을 이루어 더욱 큰 세력으로 발전하여 신라·백제 등 삼국과 경쟁하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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