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2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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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萊區-文化遺産 |
영어의미역 | Cultural Heritages in Dongrae-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이정형 |
[정의]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 부산광역시 동래구의 주요한 문화유산.
[개설]
동래는 부산의 어머니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여 삼한 시대부터 독로국(瀆盧國)과 같은 작은 나라가 있었고, 고려 말~조선 시대에는 현재 부산의 중심지였으므로 부산 시내의 다른 구·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다. 부산광역시에는 2011년 4월 말 현재 국가 지정 문화재 53점 및 등록 문화재 10점,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 175점과 문화재 자료 57점이 있다.
이상의 문화재 총 295점은 다른 광역시·도 지역의 문화재와 비교할 때 수적인 열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나마 동래에는 부산의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많은 31점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동래구에 있는 지정 문화재는 국가 지정 문화재인 사적 2점, 중요 무형 문화재 2점과,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인 유형 문화재 11점, 무형 문화재 7점, 기념물 6점, 민속자료 3점 등이 있고,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도 100여 점이 있다.
[사적]
동래구에 있는 사적은 부산 동래 패총(釜山東萊貝塚)[사적 제192호]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사적 제273호]이다. 부산 동래 패총은 3~4세기 전반의 조개무지로서 시루, 골각기(骨角器), 동물 뼈, 철기류, 불탄 흙덩어리와 숯, 홍합·굴 등이 출토되었다. 철을 달구었던 자리로 여겨지는 야철 노지(冶鐵爐址)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고대의 철 생산 관련 유적이다. 발굴된 유물의 양이 많고, 질도 우수하여 동래에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출현하는 전환기에 형성된 생활 유적으로 보인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2~7세기 초 가야·신라의 옛 무덤들로서 다양한 무덤과 유물, 철기류가 발견되어 부산의 고대 문화뿐만 아니라 가야와 신라 문화의 이해, 고대 한일 관계 연구에도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이른 시기의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 부산 동래 패총을 남긴 사람들이 묻혀 있다는 점에서 두 유적을 연계한 연구도 주목된다.
[중요 무형 문화재]
동래구의 중요 무형 문화재로는 「동래 야류(東萊野遊)」[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와 「대금 산조(大笒散調)」[중요 무형 문화재 제45호]가 있다. 「동래 야류」는 정월 보름달 아래에서 탈을 쓰고 춤을 추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농토를 상징하는 들에서 하던 전통 가면극이다. 대동 놀이인 동래 줄다리기와 밀착되어 있고, 탈놀음에는 문둥이 과장, 양반 과장, 영노 과장, 할미·영감 과장이 있으며, 양반 과장에 나오는 말뚝이탈이 유명하다. 동래에 전해지는 「대금 산조」[강백천류(姜白川流)]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 종류인 대금을 이용하여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남도 민요에 기원한 무당 음악 계통의 토속적인 허튼 가락으로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잘 표현하고 있다.
[유형 문화재]
동래부 동헌(東萊府東軒)[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1호]은 조선 시대 동래 도호부사[줄여서 ‘동래 부사’라고 표기]의 집무실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636년(인조 14)에 다시 지어졌고,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일제 강점기에 동래군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내부 모습이 바뀌었으나, 조선 후기 전형적인 관청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독진 대아문(獨鎭大衛門)[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5호]은 임진왜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을 인정받은 동래부(東萊府)가 경상 좌병영 휘하 경주 진영에서 독립된 군사권을 획득한 곳임을 알리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래부 동헌의 대문이다. 망미루(望美樓)[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4호]는 동래부 동헌 앞에 있던 문루로서, 정오와 동래읍성(東萊邑城) 4대문의 여닫는 시간을 알리기 위해 치는 북이 있었다. 1919년에는 동래 3·1 독립운동의 집결 장소로 이용되었다가 1930년경에 지금의 자리인 금강 공원 앞으로 옮겨졌다.
장관청(將官廳)[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8호]은 조선 시대 동래부 청사의 하나로서 군관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관청의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 군관청(軍官廳)[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21호]은 장관청과 함께 동래부의 군사 업무를 처리하던 관청이다. 1983년 동래 시장 앞 도로가에서 충렬사(忠烈祠)[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호]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나, 현재 동래에 남아 있는 관청 건물 중 원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동래 향교(東萊鄕校)[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6호]는 조선 초기에 국가의 정책에 따라 동래에 세워진 교육 기관으로, 현재의 공립 중·고등학교와 비슷하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다시 세워졌고, 몇 차례 옮겨졌다가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동래 향청 고왕록(東萊鄕廳考往錄)』[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98호]은 1605년(선조 38)부터 1903년(고종 40)까지의 동래 향청(東萊鄕廳) 소장 자료 목록 101건과, 향청의 기능·임원 선출·재정·운영 등에 관한 60건의 주요 문서를 요약해 놓은 책이다.
『동래 향교 고왕록(東萊鄕校考往錄)』[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99호]은 1782년(정조 6)부터 1900년(고종 37)까지의 향교 이전·재정·임원 선출 등의 문서 95건을 요약해 놓아 동래 향교와 향촌 사회 연구의 기본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사람 등의 위패 93위를 봉안해 놓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무형 문화재]
「동래 학춤」[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3호]은 학의 생태를 닮은 전통 민속 무용이지만, 양반인 한량과 관리들이 주로 추었으므로 천박하지 않고 품격이 있어서 소박함과 우아함을 함께 갖추고 있다. 「동래 한량춤」[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4호]은 기방의 협소한 곳에서 추는 입춤으로 개인적 창조력과 동작이 섬세하다. 춤사위는 동래 덧배기춤이 기본이 되며, 소박한 토속적인 멋을 풍긴다.
「동래 고무(東萊鼓舞)」[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0호]는 네 명의 협무와 함께 여덟 명이 북을 치면서 추는 춤사위로, 섬세하고 단아한 교방 춤으로서 특별한 행사 때에만 추었다고 한다. 「동래 지신밟기」[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4호]는 정월 초 동래에서 땅속에 있는 신을 밟아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빌던 놀이이다. 주요 내용은 주산 지신 풀이, 당산 지신 풀이, 우물 지신 풀이, 각 가정 지신 풀이 등이다.
「가야금 산조[강태홍류]」[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8호]는 음악 형식과 구성이 뛰어나며, 전체가 산뜻 우아하고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면을 지니고 있다. 무속과 판소리에 뿌리를 두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일반 산조는 주로 애원·처량한 느낌을 주나, 「아쟁 산조(牙箏散調)」[박대성류(朴大成流), 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16호]는 꿋꿋하며 웅건한 느낌이 강하여 경상도 사람들의 삶의 기질을 잘 담고 있다. 충렬사 제향(忠烈祠祭享)[부산광역시 무형 문화재 제5호]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사람 등을 모시고 유교 제례에 따라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기념물]
동래읍성은 고려 말에 쌓아 여러 차례 고쳐진 후, 임진왜란으로 많이 무너져 부분 보수되었다가 1731년(영조 7)에 전보다 훨씬 크게 고쳐 쌓았는데, 이때 쌓은 내력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영조 11) 남문 밖에 세운 것이 내주 축성비(萊州築城碑)[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이다.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는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철거된 동래읍성이 있던 자리로서 북문·인생문, 장대 3개소가 복원되었고, 주변 성벽은 보수 중이다.
송공단(宋公壇)[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1호]은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이하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선열들을 제사 지내기 위해 동래 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설치한 제단이다. 임진 동래 의총(壬辰東萊義塚)[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3호]은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을 지키다 순절하여 성을 고쳐 쌓을 때 등에 나온 무명용사의 뼈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
온정 개건비(溫井改建碑)[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4호]는 동래 온천의 유래와 효험을 기록하고, 욕탕을 대대적으로 고친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섭교 비(利涉橋碑)[부산광역시 기념물 제33호]는 1694년(숙종 20) 현재의 동래구 낙민동과 연제구 연산동을 연결하는 온천천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고친 것을 기념하여 공사 참여자의 직책과 이름 등을 적어 세운 비석이다.
[민속자료]
다대 첨사영 갑주(多大僉使營甲胄)[부산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2호]는 임진왜란 때 다대진성(多大鎭城)에서 순절한 다대 첨사 윤흥신(尹興信) 등을 모시고 있는 윤공단(尹公壇)[부산광역시 기념물 제9호]에 제사 지낼 때 입었다고 전해지는 갑옷과 투구이다. 동래영 갑주(東萊營甲胄)[부산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3호]는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에서 순절한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제사 지낼 때 입었던 조선 후기의 갑옷과 투구이다. 동래영 구군복(東萊營具軍服)[부산광역시 민속 문화재 제4호]은 동래영(東萊營)에 있던 군복으로서 조선 후기 무관복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전복·속옷·전립·신발 등이다.
[지정 문화재 이외의 문화유산]
2006년 상반기 기준으로 지정 문화재 이외의 동래구 문화유산은 동래 부사 선정비·거사비·생사비 32점, 주산당과 같은 민속 신앙 10점, 흥학비류 9점, 근대 건축 7점, 보호수 6점, 무덤류 4점, 유물 산포지 3점, 건물 터 3점, 불교 사찰 2점과, 사직단 터, 조선 전기 동래읍성, 동래 왜성 터[東萊倭城址], 충효비, 가마터 등 90여 점이 있다. 그리고 2006년 이후에 추가로 확인된 조선 전기 동래읍성 해자, 동래 향교 주변의 마안산 유적, 낙민초등학교 유적, 동래구 낙민동 해군 부산 관사 유적 등을 포함하면, 지정 문화재 이외의 동래구 문화유산은 100여 점에 이른다.
[의의와 평가]
동래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부산의 중심지였다. 2011년 4월 말 현재 등록 문화재와 문화재 자료를 제외한 부산광역시 내 전체 지정 문화재 228점 중 13.6%인 31점이 동래구에 보존되고 있다. 특히, 부동산의 유형 문화재와 무형 문화재는 약 4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부산광역시 내 지정 문화재 중 동래구 문화재의 비중과 위상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부산에 국한될 뿐 다른 광역시·도의 지방 자치 단체가 보존하고 있는 문화재와 비교하면 많은 것도 아니다. 이는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부족,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와 맺은 불평등 조약 등에 의한 무자비한 약탈에서도 그 요인을 찾을 수 있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개항과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겪었던 식민지 지배는 우리 민족 문화 말살과 파괴였다고 볼 수 있고, 그 최대 피해 지역의 하나가 부산이었다. 우리는 남아 있는 문화재만이라도 잘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서 시민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