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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08
한자 戱曲
영어의미역 Drama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문홍

[정의]

부산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극작가들이 공연을 목적으로 창작한 희곡의 역사.

[개설]

희곡은 문학의 갈래이지만 공연의 1차적 텍스트라는 특성 때문에 공연 예술의 갈래이기도 하다. 또, 희곡은 공연으로 연결될 때만이 존재 의의를 지니기 때문에 희곡사의 시대 구분에 있어서 연극사를 포함하여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부산 희곡사의 시대 구분 역시 연극사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 연극에 대한 시대 구분에는 몇몇 사람의 견해가 있지만 그 중에서 김동규의 시대 구분이 가장 설득력 있다.

그리고 연극사의 시대 구분은 1980년대로 종결되어 있지만, 희곡사에는 1990년대를 포함시킬 필요성이 있다. 따라서 본 희곡사는 부산 연극사의 시대 구분을 따르되, 각 연대에 대한 정의는 독자적으로 기술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까지도 기술하기로 하겠다.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활성화되었다. 그 이전의 오리지널 창작 희곡은 이주홍(李周洪)[1906∼1987]의 몇몇 작품에 불과하였으며, 주로 소설을 각색한 작품, 번안 희곡, 월북 작가의 좌익계 작품들을 사용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는 김행호, 박두석(朴斗錫) 등이 한두 작품만을 발표하였을 뿐 창작 희곡은 긴 휴면기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창작 희곡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부산 지역의 희곡사는 엄격하게 규정한다면 부산 지역에 거주하는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부산 지역 이외[경상남도 포함]의 극작가들의 작품과 소설을 각색한 작품 역시 본 희곡사에서 제외한다. 그렇게 본다면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사는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그 출발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해방 공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희곡의 작가와 작품명, 그리고 발표 시기와 공연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작가를 비롯하여 작품명, 발표 시기, 작품 의의, 연극사적 의미, 공연 상황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한편, 창작 희곡 발표의 시대적 배경과 연극적 상황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가 적용되고, 타 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의 부산 지역 공연은 지역 창작 희곡사의 범위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하므로 제외될 수밖에는 없는 한계를 지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창작 희곡의 여명기]

창작 희곡의 여명기[1945~1959]인 해방 공간부터 6·25 전쟁 발발까지는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 분야에 있어서 과거를 반성하고 청산하면서 국가의 기초를 다지던 시기로 극도의 혼란을 거듭한 시기이다. 문학을 비롯한 문화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이러한 혼미는 마찬가지였다. 친일 잔재 청산과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된 시기로, 연극과 희곡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문화 예술 분야와는 달리 관심과 무지의 결여, 그리고 여건의 불비로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당시의 경상남도와 부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상남도에 속해 있던 부산시의 연극적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남녀 학교 연극과 대학 연극, 그리고 일반 극단의 지역 작가 창작 희곡의 공연 목록을 참고하여 당시의 연극과 창작 희곡의 여명기적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일반극보다는 오히려 학교극, 그중에서도 여학교의 연극 공연이 활성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특이한 것은 실업계보다는 인문계 학교의 연극 공연 횟수가 잦다는 점인데, 요즈음의 인문계보다는 실업계 고교의 연극이 더 왕성하다는 점과 판이하다.

대학극에서의 지역 작가의 창작극 공연은 아주 저조하다. 다만 수산대학교에서 1953년 6월 이주홍의 희곡 「신부 추방」과 1954년 제3회 공연에 이주홍의 희곡 「탈선 춘향전」을 공연하였다. 교육대학이 1957년 제1회 공연으로 이주홍의 「뒷골목」을 공연하고 있을 뿐, 부산대학과 앞의 2개 대학의 여타 공연은 대부분이 셰익스피어, 유진 오닐의 익히 알려진 작품을 공연하였다. 부산 지역 작가를 제외한 국내 작가의 창작 희곡은 거의 대부분이 공연하지 않았다.

외국의 유명 극작가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무래도 그들의 작품은 일단 연극사적으로 예술적 완성도와 연극 미학적 구조가 뛰어날뿐더러, 국내와 외국에서의 잦은 공연으로 작품 해석에 필요한 선행 자료들을 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극예술연구회의 지도 교수들이 대부분 영문학 교수들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작품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도 추론된다.

당시의 창작 희곡은 이주홍의 작품이 레퍼토리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주홍 이외에 홍달, 김이수, 김종성, 염주용 등 작가[학교 연극반 지도 교사, 아니면 언론계의 인사]들은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었기 때문에 연극사적으로는 공연 기록의 한 부분만을 차지할 뿐 희곡사적으로는 큰 의의를 갖지 못하고 있다.

이주홍은 해방 공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각색 작품을 포함하여 15개의 창작 희곡을 내놓았다. 거의 일 년에 한편 꼴로 이주홍의 연극적 감각과 문학적 상상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탈선 춘향전」은 모든 학교의 단골 레퍼토리로 선정되었다. 왜냐하면 「탈선 춘향전」은 다른 작품보다 더 연극적 재미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무대 여건과 일치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각 학교의 고정 레퍼토리였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창작 희곡 부진의 직·간접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연극적 상황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역시 부진을 면하지 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기도 하다. 해방 공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한국 전역뿐만 아니라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어둠이 걷히어 가는 여명기에 해당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창작 희곡의 맹아기]

창작 희곡의 맹아기[1960~1969]인 1960년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에 해당된다.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한 4·19 혁명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군사 정권의 된서리를 맞아 다시 한 번 자유와 인권을 유보당하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격변과 1963년 1월 1일의 경상남도에서 분리되어 부산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부산 연극은 그 이전의 난맥상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의 조직력과 체계성을 갖추면서 제자리 찾기를 시도하였다.

1962년 8월에 군사 정부의 문화 예술 통제의 의도로 결성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예총]의 출발로 부산에도 예총 산하의 연극협회 부산지부가 설립되어 관 주도의 합동 공연과 직속 극단이 생기게 되면서 극단들이 이후 죽순처럼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리고 1965년 4월에 부산 일보사 주최로 ‘영남 학생 연극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되고, 아동극도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 7월의 아동 극단 ‘새들’의 창단을 시작으로 1967년 7월까지 무려 8개의 아동 극단이 창단되었다. 아동극과 대학극이 활성화되는 것과는 반대로 고교 연극은 침체되었는데, 이는 대학 입시라는 현실적 중압감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일반 극단도 역시 1963년 3월에 창단된 ‘샛불극회’를 필두로 1969년 9월 ‘소극장 69’까지 무려 17개의 극단이 창단되었다. 이들 극단 중에서 1970년대까지 꾸준한 활동을 하는 극단은 ‘전위무대’, ‘원형극장’, ‘소극장 69’ 등 세 개로 거의 대부분의 극단들이 그 명맥을 오래 지키지 못하였다.

이 시기의 부산 지역 극작가에 의한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을 전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전대보다는 퇴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주홍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시궁창에도 꽃은 핀다」와 「연이야 울지마」 등 두 작품만을 내놓았고, 그 이외에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작가들은 대부분이 한두 작품을 끝으로 창작 활동을 마감하였다. 이들 중 강하영과 김종달은 방송극 전속 작가로 주로 라디오 드라마를 썼다. 이들은 방송극과 희곡이 같은 드라마라는 특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서 창작 희곡을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산을 떠나거나 활동을 중단하여 1970년대까지 이어 가지 못하였다.

현재 부산의 원로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해군(崔海君)[1926~]도 당시에 두 편의 희곡을 내놓았다. 최해군은 「종막」이 『동아 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되어 희곡 분야에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 뒤에도 「그날의 그딸들」이라는 신작 희곡을 발표하여 공연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소설가로 활동하던 이주홍의 권유와 최해군과 친분이 있는 연극인의 청탁 때문에 희곡을 창작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그 이후부터 최해군은 희곡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는 그가 연극적 감각과 무대 메커니즘과의 소원함에서 오는 부담감과 희곡 창작이 곧바로 공연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연 시스템, 그리고 현실적인 고료가 지급되지 못하는 연극계 관행 등의 여러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대학극의 공연보에서 이주홍, 강하영, 최해군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부산 일보』 주최로 1965년부터 다음 해까지 열린 ‘영남 학생 연극 경연 대회’의 출품작으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극의 작가 중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의 정영태와 이병구는 현재 부산에서 의사로 의료 활동을 전개하면서 시를 쓰고 있는 중견 시인이다. 정영태와 이병구 역시 대학 시절에는 예리한 문학적 감수성과 연극적 감각으로 창작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한 경력을 갖고 있는데, 부산의 연극인들은 앞으로 이들과의 연대를 한 번쯤 숙고해 볼 일이다.

또한 대학의 극예술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쓰던 예비 극작가들은 한두 작품을 끝으로 지금까지 잊히고 있다. 아마도 예비 극작가들은 졸업과 동시에 생업에 힘쓰게 되면서 연극계로 편입되지 못했거나, 아니면 부산의 연극인과 작가들이 이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을 창작 희곡 쪽으로 편입시키지 못한 것은 당시의 부산 연극계로서는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1960년대의 10년 동안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열 편도 채우지 못하였다. 전대의 이주홍 한 사람의 창작에도 못 미칠 만큼 그 성과가 부진하다.

[창작 희곡의 침체기]

1970년대는 부산 연극의 침체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연극인들은 공연장이 없다는 연극 환경의 열악성과 지원이 부족하다는 연극 행정의 부재를 탓했다. 그렇지만 1973년 10월 10일 부산 시민 회관이 개관되면서는 작품 제작에 열성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73년 12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부산 시민 회관 소강당에서 개관 기념 공연의 일환으로 재부 연극인 합동 공연인 「조급한 마음」[존 패트릭 작, 김영송 연출]의 막이 올랐다. 뒤이어 1974년 2월에는 역시 소극장에서 연출가 김동규와 이동재가 주축이 되어 극단 ‘원형극장’의 창립 공연인 「연인 안나」[샤르트르 작, 김동규 연출]의 막이 오르면서 각 극단들의 공연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1970년대는 동인제(同人制) 극단의 형태로 수많은 새로운 극단이 생기고, 1973년에 발족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지원책으로 연극 행정이 체계화를 이루어 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산지부 합동 공연인 「아! 동래성」[박두석 작, 전성환 연출]으로, 이 공연을 계기로 ‘부산 무대 예술제’라는 관 주도 행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연 예술에 대한 행정의 지원은 연극인들의 나태와 무기력, 그리고 작품 제작에 대한 안일한 태도 등의 폐해를 낳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각 극단들의 부침이 시작되는데, 1970년 9월 18일 ‘드라마센터 부산극회’[대표 천재동]를 필두로 1978년 극단 ‘레퍼토리시스템’[대표 신태범]이 창립할 때까지 무려 12개의 동인제 극단이 창립하는 난맥상을 보이게 된다.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의 공연 상황을 대학극과 일반극의 공연보를 통하여 살펴보면, 1970년대 부산 지역 작가들에 의한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은 극히 저조하다.

우선 대학극 공연을 살펴보면, 새롭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예비 작가들이 무려 12명에 작품 수만 해도 16편이나 된다. 그런데 이들 중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는 박영민 한 사람뿐이고, 나머지 작가들은 활동을 중단한 채 연극권 밖으로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이 시기에 이들의 창작 희곡 활동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1970년부터 1974년까지 5년 동안 부산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주최로 이루어진 ‘대학 연극제’와 1978년부터 개최된 ‘전국 대학 연극 축전’의 부산 지역 예선 대회라는 연극 행사 때문일 것이다.

일반 극단 공연에서의 지역 작가 창작 희곡의 공연 실적은 극히 저조하다. 10여 년 동안에 단 네 작품만이, 그것도 1회성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 중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김숙현 한 사람뿐이나, 그 역시 현재는 창작 희곡의 발표와 공연이 뜸한 편이다. 김행호는 부산 지역을 오래 전에 떠나 현재는 서울에서 방송극을 집필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인 조효승과 유한수는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된 사람들로, 지금은 그 소재와 근황을 확인할 길이 없는 경우이다.

이때 아동극의 활동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1979년 7월 서울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로 개최된 ‘제19회 전국 아동극 경연 대회’에서 수영초등학교가 「겨울꽃」[박원돈 작, 연출]으로 단체 최우수상과 개인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미래의 부산 연극의 잠재력을 전국에 과시한 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창작 희곡의 중흥기]

1980년대의 부산 연극과 창작 희곡은 비로소 호흡이 잘 맞아떨어지는 중흥기를 맞게 된다. 창작 희곡의 중흥기[1980~1989]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부산의 각 극단들이 몇 개의 극단 창단과 침묵의 악순환을 거듭함이 없이 비로소 제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극단의 이합집산의 좋지 못한 관행이 일어나면서 동인제 극단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든지, 한국연극협회 부산지부의 불신임안으로 협회가 1년 동안 양분되는 불상사도 일어나는 등 다사다난한 연대로 기록이 된다.

1980년대에 창작극이 활성화를 이룩하는 촉매제가 된 것은 ‘전국 지방 연극제’와 이 대회의 부산 지역 대표 극단을 선발하는 예선 형식으로 만들어진 ‘부산 연극제’의 자극 때문이다. 지역 대표로 선발되는 출품작이 지역 작가의 신작 초연일 경우에는 전국 연극제 수상에 관계없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부터 충분한 고료를 받았으므로, 열악한 고료로 인하여 창작 의욕을 잃고 있던 지역 작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980년대에 부산 연극제에 출품된 지역 작가들의 창작 희곡 작품을 살펴보면 그 양적, 질적 변화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제2회 대회부터 제7회 대회까지 6년 동안 부산 연극제에 출품된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작품 수는 무려 16편이나 되며, 새롭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작가의 수도 12명이나 되어 부산 연극계와 창작 희곡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들 중에서 현재 극작 활동을 중단하고 있는 사람은 천재동과 노혜경 두 사람뿐이고, 나머지 10명은 90년대를 훨씬 넘어선 지금까지도 창작 희곡을 쓰고 있다. 이들 중에서 신태범은 제5회 대회에 「노인, 새되어 날다」를 전국 연극제에 출품하여 단체 대상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김문홍은 제7회 대회까지 세 작품을 출품하여 제6회 대회에서 「안개 주의보」로 희곡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들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이 일선 연극 현장에 참여하지 않고 희곡만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나 연출 등의 경력을 지닌 채 직접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희곡은 공연 예술인 연극의 1차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연극의 특성과 무대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고서는 창작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렇듯 1983년부터 개최된 전국 연극제와 지역 예선 대회로 치루는 부산 연극제가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을 활성화시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1980년대에는 그 이전부터 활동을 지속해 온 기존의 5개 극단 이외에도 1981년 8월에 창단 공연을 가지고 출발한 극단 ‘처용’ 외에 무려 10개 극단이 창단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각 극단별 지역 작가의 창작극 공연을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을 가장 많이 공연한 극단은 ‘전위무대’와 ‘부산무대’이지만, 부산무대의 공연은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는 것보다는 연출자와 극단의 단원이 직접 창작하고 있다는 점과, 그 극적 완성도에 있어서 신뢰가 가기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극단 ‘한새벌’, ‘도깨비’, ‘부산레퍼토리시스템’ 등도 역시 신인 작가의 발굴보다는 극단의 기존 단원이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교사 극단 한새벌은 한 작가를 꾸준히 지원하여 계속 다른 작품을 내놓고 있는데 비하여, 극단 전위무대는 오히려 신인 작가를 수차례 발굴을 하지만 한두 작품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극단 ‘부두극장’은 창작 희곡보다는 번역 희곡의 공연에 치중하고, 극단 ‘처용’은 지역의 작가보다는 서울 작가의 작품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부산 연극의 두드러진 성과 중의 하나는 ‘가마골 소극장’의 개관과 극단‘연희단 거리패’의 창단으로 인한 이윤택의 극작 활동이다. 그는 1986년 7월 광복동 용두산 공원 입구에 가마골 소극장을 개관하고 「죽음의 푸가」를 창단 공연으로 대장정을 하게 된다. 그 이후에 이윤택은 1980년 『국제 신문』언론 통폐합을 극적 소재로 한 상황극 계열의 「시민-K」를 쓰고 연출하여 서울 ‘동숭 연극제’ 초청 참가작으로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다시 1989년 10월에 극단 ‘세실’[채윤일 연출]의 「오구 -죽음의 형식」으로 서울 연극제에 참가하면서, 그 작품으로 한국평론가협의회 최우수 예술가상을 수상하면서 1980년대를 마감하게 된다.

1980년대 창작 희곡의 획기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는 창작 희곡집의 발간이다. 김문홍은 1987년 7월 첫 창작 희곡집 『안개 주의보』[광문출판사]를 상재하게 된다. 『안개 주의보』는 창작 희곡집으로서는 부산 최초이고, 또한 그 이후에 여러 작가들의 창작 희곡집을 발간하는데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문홍의 작품집에는 표제작인 「안개 주의보」를 비롯하여 「가시덤불」, 「악마들의 잔치」, 「새가 되어라, 새가 되어라」, 「수직 환상」 등 6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안개 주의보」를 제외한 5편의 희곡은 모두 그가 속해 있는 교사 극단 한새벌이 공연한 작품들이다.

김문홍의 뒤를 이어 하창길이 첫 희곡집 『죽음에 관한 보고서』[1988. 12. 도서출판 지평]를 상재하게 된다. 『죽음에 관한 보고서』에는 표제작을 비롯하여 「옥상에서」, 「끈」, 「눈, 더러운 신(神)의 발자국」, 「울음소리」, 「반신반수」, 「생일 파티 혹은 파리떼」, 「노아의 홍수」 등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980년대에 발간된 이 두 권의 희곡집은 부산 창작 희곡 50년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으로 기록된다.

1980년대의 대학극은 1970년대와는 달리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에 소홀하고 있다. 부산대학교가 장창호의 「해상 아우슈비츠」[1986] 1편, 수산대학교는 정우숙의 「쌍곡선」[1989. 11] 1편, 부산여자대학교가 박범의 「청산리 벽계수야」[1983] 1편,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이 이명분의 「창밖의 사람들」[1984]과 김경승의 「부정」[1986] 등 2편, 부산공업대학이 윤일광의 「스핑크스의 미소」[1987] 1편, 지산간호전문대학은 전동수의 「산지기네」[1985, 1989] 1편, 해양대학교는 조충환의 「붕어와 생선회」[1985]와 진주현의 「탈출」[1989] 등 2편, 부산여자전문대학은 이주홍「탈선 춘향전」[1981] 1편, 고신대학교는 박우택의 「모의 총회」[1982], 강대영의 「사인 사회」, 하창길의 「반신반수」[1989] 등 3편, 동래여자전문대학은 최영찬의 「까마귀떼」[1983], 하창길의 「반신반수」[1987] 등 2편, 부산외국어대학은 석우철의 「8169」[1985], 이창현의 「봄」[1988] 등 재공연을 포함하여 총 17편을 공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중에서 현재까지 극작 활동을 계속 하고 있는 작가는 하창길, 윤일광 두 사람뿐이다. 대학에서의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발표가 부진한 것은 1980년대의 정치·사회적 격변의 와중에서 순수 희곡보다는 그들의 이념과 운동성을 잘 드러내는 마당극을 선호한 데서 오는 침체 때문일 것으로 추론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1980년대의 창작 희곡 현황에 있어서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과 많은 작품이 발표되지만, 여러 번의 공연을 통한 완성된 희곡의 추구보다는 단발성의 공연으로 끝나고 있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부산 지역 창작 희곡은 전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연극의 발전보다 앞서 가는 중흥기를 맞고 있었다는 데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1980년대의 이러한 중흥을 밑바탕으로 부산의 창작 희곡은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획기적인 발전의 여건과 계기를 마련하여 드디어 르네상스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

1990년대에는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1990~1997]를 맞는다. 이러한 창작 희곡의 활성화는 1989년의 ‘부산극작가협회’ 창립, 1994년에 발족을 본 ‘부산창작극연구회’, 부산문화연구회와 부산극작가협회의 공동 주최로 개최한 ‘드라마 창작 교실’ 등의 행사로 인한 희곡 창작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창작 교실의 수강 인원이 100여 명이 되었다는 것은 1970년대의 소설 문학의 독자에 비해서 크게 증가한 것이다.

이는 1980년대를 접어들면서 젊은 층이 영상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와 연극 쪽으로 몰리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희곡에 대한 관심은 우선 대학의 국문과 강좌 개설에서도 그 관심의 열도가 현저히 드러나, 1970년대까지는 거의 황무지에 가까웠던 희곡 문학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관심을 표명하면서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희곡 문학 강좌가 대학의 국문과에 속속 개설되기 시작한다.

1990년대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 현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1990년의 제10회부터 1997년의 제15회까지 ‘부산 연극제’의 공연보를 살펴보면, 창작 희곡이 총 22편이 출품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신작 초연이 14편, 소설의 각색이 2편, 극단 공동 구성이 2편, 나머지는 서울의 다른 극단이나 부산의 극단에서 이미 공연했던 작품들이다.

이 기간 중에 새롭게 얼굴을 내미는 작가로는 극단 ‘열린 무대’의 이창복과 권남희, 극단 도깨비의 이은정, 극단 예랑의 하정애, 극단 처용의 이동재 등으로, 하정애를 제외한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창작 희곡을 꾸준히 써 오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연출가 이동재는 1년의 일본 연극 연수를 끝내고 와서 새로운 희곡을 썼다는 점이다. 어쨌든 1980년대 초부터 개최된 전국 연극제와 부산 연극제는 부산 지역 극작가들의 창작 의식을 고무시켜 창작 희곡을 활성화시켰다는 점은 부산 연극사에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부산 연극제를 제외한 부산 지역 극단에 의한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공연들이 이목을 끌었다. 교사 극단 한새벌이 「일식」(1990. 10), 「산천에 봄은 다시 오고」 등 김문홍의 희곡 2편을, 극단 현장「하늘로 간 고래」[1990], 「덜구 소리」[1991], 「자갈치」[1992], 「달빛 신화」[1994], 「유리 버스」[1995] 등 이현대의 작품 5편을, 극단 처용이 이동재의 신작 「깊은 밤까지」[1993] 1편을, 극단 부산무대가 김문홍의 희곡 「가시덤불」을 「1950」으로 개제하여 공연하고, 극단 여명이 오은희의 신춘문예 당선 희곡인 「아바돈을 위한 조곡(弔曲)」을 각각 공연하였다.

또한 극단 도깨비가 김익현의 희곡 4편, 하창길의 희곡 2편, 이은정의 희곡 4편, 천재동의 희곡 2편, 김경화의 희곡 1편 등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13편을 공연하였다. 극단 맥은 김경화의 희곡 9편, 신태범의 희곡 1편, 박원돈의 희곡 1편 등 모두 11편을 공연했으며, 극단 열린 무대는 이창복의 각색 작품 3편, 권남희의 희곡 2편 등 5편을, 극단 세이(SAY)는 하창길의 희곡 2편을 이 기간 중[1990~1997. 8]에 공연하고 있어, 가히 지역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가 도래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극단 새벽은 지금까지 비제도권으로 민족극 계열의 작품을 공연해 왔던 관계로 제도권 쪽에서는 소외되어 온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두 번의 ‘아시아 연극인 페스티벌’[제1회는 1995년, 제2회는 1997년 8월 14~24일까지 열림]의 주최로 한국 연극의 위상을 널리 알리고 높였다. 특히 1996년에 공연된 윤명숙의 모노드라마인 「어머니 날 낳으시고」는 그 작품의 문학성과 연극적 완성도가 뛰어나 부산의 ‘국제연극비평가그룹’이 주는 ‘제2회 올해의 좋은 연극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이 중에서 극단 한새벌, 현장, 맥 등은 자체로 극작가를 회원으로 보유하고 있어서 지역 창작극 공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극단 도깨비는 새로운 극작가의 작품을 계속 공연하고 있다.

1997년의 특이할만한 연극적 사건은 ‘가마골 신춘 단막극제’이다. 가마골 소극장의 주최로 1997년 3월 20일부터 4월 6일까지 1997년 부산의 『국제 신문』『부산 일보』의 신춘문예 당선 희곡들을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신예 연출가들에 의하여 공연되었다. 즉 「파행」[『국제 신문』 당선작, 손재완 작, 이민아 연출], 「목소리를 죽이라니깐」[『부산 일보』, 윤지형 작, 조영진 연출], 「세기말 비너스」[『부산 일보』, 장병훈 작, 유수미 연출] 등 세 작품들의 공연은 신인 극작가의 작품에 공연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창작 의욕을 고무시켜 주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부산 작가의 창작 희곡집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부산 지역의 작가들은 부산극작가협회의 회원 합동 작품집이 3권을, 이윤택이 『웃다, 북치다, 죽다』[1993. 12, 평민사], 『문제적 인간』[1995. 8, 공간미디어] 등 2권을, 김경화가 『꼭두』[1992. 7, 해성]와 『영웅 광대』[1995. 10, 해성] 등 2권을, 이현대가 첫 희곡집 『자갈치』[1994. 3, 해성]를, 하창길이 둘째 희곡집 『누가 장미에 수갑을 채웠나』[1994. 12, 해성]를 상재하는 등 창작 희곡집을 앞다투어 상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현대「자갈치」가 1992년 제10회 부산 연극제에서 단체 대상과 전국 연극제에서 단체 우수상과 희곡상을 수상하였다. 김경화의 희곡 「샛바람 부는 날에」는 1996년 제14회 부산 연극제 단체 대상과 전국 연극제의 단체 장려상과 희곡상을, 하창길의 「그 여자의 숲속에는 올빼미가 산다」는 1997년 제15회 부산 연극제 단체 대상과 전국 연극제 단체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 기염을 토하며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가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 이윤택의 희곡 「오구-죽음의 형식」은 한국평론가협의회 최우수 예술가상 수상[1989. 12], 제2회 동경 국제연극제 참가[1990. 9], 독일 에센 세계연극제 참가[1991. 6] 등의 업적을, 또한 「시민-K」는 영희 연극상[1990. 4]을 수상하고, 「바보 각시」의 후꾸오카 유니버시아드 프레 문화 축전 공연[1993. 9],「가인(歌人)」의 제2회 아시아 연극인 페스티발 행사의 ‘한국의 연출가전’에 초대[1997. 8]되는 등 세계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부산 연극의 위상을 높여 주고 있어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에 한층 어울려 보인다.

[신인 극작가의 약진으로 인한 극작의 세대교체]

1998년에 접어들면서 부산 연극계에 새로운 판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현재 부산연극협회 소속 19개 극단 중 최장수 극단은 전위무대[1964년 창단]이며, 그 다음으로 연륜이 오랜 극단은 한새벌[1973], 현장[1974], 부산레퍼토리시스템[1978] 등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은 부두연극단[1984. 10], 맥[1987. 3], 예사당[1987. 10], 하늘개인날[1988. 11] 등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극단은 1990년대 이후에 창단한 신생 극단들이다.

1970년대에 창단한 교사 극단 한새벌은 부산교육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출신의 현직 초등학교 교사들로 구성된 극단으로,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중에 연습하여 공연하기 때문에 1년에 한두 차례의 공연 실적을 채우기에 급급한 형편이다. 극단 현장은 창단 이후 지금까지 126회의 공연 실적을 갖추고 있지만, 1998년 이후로는 거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

그리고 극단 부산레퍼토리시스템 역시 단원들의 이합집산으로 거의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들 중에도 극단 도깨비는 기장 바다 축제를 중심으로 한 공연 활동에 치중하고 있다. 극단 예사당 역시 1999년 이후에는 1년에 한 작품 정도만을 공연해 오다가 극단의 대표였던 연출자 손기룡이 2004년 부산시립극단 상임 연출로 자리를 옮기면서 거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한 극단들 중 극단 맥, 하늘개인날, 부두연극단 정도만이 1년에 2, 3회의 공연 활동을 펼치고 있을 뿐이다.

1998년 2월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되는 것을 기점으로 하여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창단된 연륜이 오래 된 극단과 신생 극단 사이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눈에 띄게 변모되는 것은 신인 극작가들이 대거 약진하여 부산 지역의 창작극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기획한 소극장 페스티벌로 여류 극작가 이흔주와 고연옥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들로 조직되어 창단된 극단 동녘[1999. 8 창단]의 구성원인 오치운, 심문섭, 박성진 등이 창작극을 연이어 발표하기 시작하며, 1997년 극단 열린무대를 통하여 극작 겸 연출자인 구현철이 장정일 희곡 시리즈1인 「실내극. 어머니, 실크 커튼은 말한다」를 선보이면서 부산 연극계에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극단 자유바다를 창단한 극작 겸 연출자인 정경환이 등장하여 한국 현대사의 쟁점을 희곡화하여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역 신문의 신춘문예 희곡 부문 공모는 창작 희곡 활성화에 한 몫을 하였다. 부산 지역의 양대 일간지인 『부산 일보』『국제 신문』은 신춘문예 희곡 부문을 신설하여 작품을 모집했으나, 그중 『국제 신문』은 응모자 수가 적다는 현실적인 숫자 논리에 의해 신설했던 희곡 부문을 실시 몇 해만에 폐지해 버리고, 현재 『부산 일보』만 지금까지 계속 공모해 오고 있다.

1998년에는 중앙동 시대를 마감하고 광안리로 옮긴 가마골 소극장에서 ‘98 가마골 신춘 단막극제’를 개최하고, 홍윤희의 「광안리를 쏘아라」를 연희단거리패의 연기자 겸 연출자인 김경익이 연출하여 공연하였다. 그러나 재기 발랄한 신인 극작가 홍윤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최후로 지역 창작극 활성화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1998년 12월에는 비제도권 극단 새벽이 윤명숙의 1인극 「어머니 날 낳으시고」를 공연하여 연극계와 비평계의 주목을 받았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는 줄기차게 창작극만을 고집해 오고 있던 연출자 겸 극작가인 이성민의 여타 작품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작품 세계로, 문학성과 연극성의 두 측면에서 성공작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1998년 1월 23일 부산시립극단 창단을 시발로, 1998년 4월에는 이현대의 창작 희곡 「자갈치」부산시립극단 창단 공연의 레퍼토리로 확정되었다. 「자갈치」는 부산 지역 서민의 애환이 서린 자갈치 시장과 어판장을 중심으로 강인한 생명력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서민들의 애환과 페이소스를 그린 작품이다. 창단 공연을 둘러싸고 연극 비평가 정봉석의 비평과 부산시립극단 예술 감독 중의 한 사람인 극작가 겸 연출자인 김경화의 이에 대한 반론, 그리고 당시 『국제 신문』 연극 담당 기자였던 유창우의 재반론으로, 연극 비평과 현장 공연 예술계의 껄끄러운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1999년 제17회 부산 연극제에서 극단 도깨비는 그 해 『서울 신문』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자인 신인 박성철의 「집으로 가는 길에」를 공연하였다. 박성철은 「집으로 가는 길에」 이후에는 후속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같은 극단을 통해 세 작품을 발표한 바가 있는 신인 여류 극작가인 이은정도 한때는 작품을 통해 재기 발랄한 문학적 감수성을 선보였으나, 그 역시 이후에는 후속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에는 1월에는 새 천년 맞이로 이윤택의 「해야 해야 나오너라」가 공연되었다. 연극과 미술을 비롯한 인접 예술 장르와의 접목을 시도한 실험적 양식으로 주목을 받아 오고 있던 극작가 겸 연출자인 허한범의 「시선과 응시의 분열」을 공연하였고, 신인 극작가 오치운이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야외극으로 첫 선을 보인 「메두사쿠스」와 부산 연극제 희곡상 수상작인 「사랑, 첫 이미지-꿈」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여류 극작가인 김숙경의 「또 다른 시작은 없다」,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4학년 졸업 워크숍 공연 작품인 「바리데기」가 공연되어 연극계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극단 ‘PG 신우’에 의해 공연된 김숙경의 창작 희곡 「또 다른 시작은 없다」는 희곡적 측면으로서의 서사 구조와 무대적 표현 형식에 있어서 단막극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시작은 없다」는 도시 중산층 가정이라는 극적 공간과 저마다 모두 나름대로의 불행한 일상을 간직하고 있는 데에서 야기되는 극적 갈등, 그리고 이들 세 딸과 어머니의 일상에서 빚어지는 반목과 대립, 충돌과 화해라는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고 있다. 즉, 논리적 인과 관계에 의한 서사 구조로서의 극적 전개보다는,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그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현실에 대한 반응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또 다른 시작은 없다」는 문학성과 연극성에 있어서 고른 수준을 유지하여 평단의 주목을 받은 바가 있다.

또한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4학년 학생들의 「바리데기」 공연은 창작극 생산이 부진한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다. 「바리데기」는 몇 부분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가해진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완벽한 주제 의식과 연극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바리데기」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정통 사실주의 희곡이 아니라, 신화와 현실의 길트기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실험적 텍스트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바리데기」는 무대 후면 중앙에 위치한 교통 신호기라는 연극적 오브제를 매개로 하여, 신화와 현실이 연극적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넘나들며 스며들고 있으며, 여러 가지 천을 통한 극적 상황과 배경의 이미지화, 다양한 마임을 통한 인물의 심리적 정황의 표현, 다양한 조명과 음악을 통한 연극적 이미지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실험적인 작품이다. 「바리데기」는 공동 창작이라는 작업을 통하여 대학과 일선 연극 현장의 교류적인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신인 극작가 겸 연출자인 심문섭은 「바리데기」를 시발로 하여 부산 연극제에 창작 희곡 「가락국기」를 선보이는 한편, 2004년 11월에는 부산배우협의회의 정기 공연 작품으로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희랍 비극인 「오레스테이아」를 우리 현실과 상황에 맞게 재창작한 「오레스테스 죽이기」로 재구성 창작하고 연출하여, 같은 극단의 오치운과 함께 지역 창작 희곡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하기에 이른다.

2001년의 주목할 만한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으로는 극단 열린 무대의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된 여류 극작가 권남희의 「종이뱅기」이다. 이 작품은 1995년의 초연[총 24회 공연]과 1998년의 앙코르 공연, 그리고 2001년 9월 20일부터 10월 14일까지 공연되는 등 꾸준하게 공연되어 그 문학성과 연극성을 인정받아, 부산연극비평가 그룹이 주는 ‘올해의 좋은 연극상’을 수상하여, 희곡 텍스트는 공연을 통해서만 완성된다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2001년 11월에는 극작가 김문홍이 본격적인 연극 평론집으로서는 최초로 『공연과 비평』을 상재하여 일선 연극 현장과 학계에 좋은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부산 지역의 극작가는 김문홍, 김경화, 이현대[2004년 작고], 양왕용, 장세종, 이성민, 허한범, 윤지형, 오치운, 심문섭, 조용석, 김숙경, 이흔주, 김지용, 주혜자, 김익현, 구현철, 박용헌, 최재민, 양지웅, 박현철, 이정남, 심상교, 이철우 등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 중 극작만을 전업으로 하고 있는 작가는 김문홍과 시인인 양왕용, 그리고 이철우와 심상교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출과 극작을 겸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바로 극작은 연극의 특성과 무대 메커니즘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연출과 극작을 겸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는 구현철, 오치운, 심문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작품의 문학적 수준이 부족하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현재 부산에는 이러한 극작가들만의 모임인 부산극작가협회가 있으나, 몇 년 동안은 개점휴업 상태에 있다.

2005년 부산 연극제부터는 경연 작품의 참가 규정을 대폭 수정 발표했는데, 이는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을 활성화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제도는 부산 연극제 경연 부문에 참가하는 희곡 텍스트에 제한 규정을 둔 것인데, 부산 지역 이외의 극작가의 희곡은 무조건 창작 초연이어야만 하고, 부산 지역 극작가의 작품은 2년 이내의 재공연 작품은 가능하다는 조항이었다. 이러한 폐쇄적 조치는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 활성화를 우선순위에 두겠다는 고육지책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제한 조치가 없다면 거의 대부분의 극단들이 이미 검증된 서울 지역 유명 작가의 작품만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경연 부분 참가 극단이 제법 많았으나, 이 제도를 시행하고부터는 5~6개 극단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이 제도를 시행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극단의 연출자들이 희곡 텍스트를 창작하는 현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이런 현상은 지역 창작 희곡이 증가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희곡 텍스트의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6년 제24회 부산 연극제에서는 극단 ‘바다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PLAY 5 Mankind History」[김지용 작, 연출]라는 작품이 10개 수상 부문에서 두 부문을 제외한 8개 부문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극단 ‘바다와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단체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하여 개인상 부문을 거의 모두 독차지하는 기현상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제도의 긍정적인 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05년에는 신인 극작가 강태욱의 창작 희곡인 「B.C 2430」이 전국 연극제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작품의 문학적 수준을 검증받았고, 또한 부산 연극제에서는 신인 극작가 김지용의 창작 희곡이 희곡상과 연출상을 동시에 수상하여 희곡 텍스트의 문학성과 연극성을 동시에 검증받은 일이 이를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지금 부산 지역에는 문예창작학과를 둔 대학이 세 군데나 있지만, 이들 문예창작학과에서 희곡을 전공하는 학생 수는 별로 많지 않고, 등단한 사람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계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젊은 연출가 겸 극작가들이 주도하고 있으며, ‘부산창작극연구회’를 중심으로 신인 작품 발굴과 기성 작가의 신작 희곡을 일선 연극 현장에 공급하려는 노력을 활발히 하고 있어, 앞으로 부산 지역 극작가의 창작 희곡은 날로 증가 추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된다.

2006년 이후 희곡 부분에서 가장 큰 사건은 2008년 부산연극협회 주관의 ‘전국 창작 희곡 공모전’ 개최이다. 이 공모전은 2013년 제7회에 이르고 있으며, 2014년에는 김문홍 희곡상이 제정되어 시행할 예정이다. 김문홍 희곡상은 부산 지역 활동 작가를 발굴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제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금까지 1945년의 해방 공간부터 2013년 현재까지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을 중심으로 부산 창작 희곡 60년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연극의 발전과 비례하여 그 질적·양적 성장을 이룩해 왔는데, 여기에는 대학극의 활성화가 한 몫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창작 희곡의 중흥은 1980년대에 개최된 전국 연극제와 이의 예선 대회 형식으로 존재하는 부산 연극제가 그 기폭제가 되었다.

1980년대의 중흥기를 거쳐 1990년대에는 희곡집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등 가히 창작 희곡의 르네상스기가 도래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직도 부산 지역의 창작 희곡은 400만이라는 인구 비례와 문화적 환경, 그리고 연극의 발전과 비교해 볼 때 부산 희곡사의 분수령을 이룰 만큼의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역 창작극 부재 원인을 네 가지로 구분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 창작극의 극적 완성도 미흡이다. 둘째 지역 극단들에 의한 지역 창작극의 냉대와 무관심이다. 셋째, 희곡 원고료의 현실적인 수준 미흡이다. 넷째 부산 관객의 서울 지역 연극에 대한 문화적 사대 의식, 연극계 밖의 문학을 비롯한 문화 예술 종사자와의 연대 관계 소홀, 대학 연극인들과의 교류 부족 등이다.

이러한 지역 창작극의 활성화 방안으로는 극작가와 극단의 교류 활성화, 신인 발굴제도의 확충, 창작극 개발 금고 운영, 대학의 희곡 문학에 대한 관심과 노력 등을 들 수 있다. 끝으로 1990년대의 부산 지역 작가의 창작 희곡의 발전 상황은 2000년대에나 가서야 정당한 자리매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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