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2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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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學 |
영어의미역 |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구모룡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언어와 문자로 표현한 예술.
[개설]
넓게는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창작된 문학과 부산 지역 문인이 창작한 문학을 모두 부산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란이 적지 않다. 개항 이후의 부산과 개항 이전의 부산은 공간과 도시의 성격에서 큰 단절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내용에 기준을 둘 것인가, 작품을 쓴 사람에 기준을 둘 것인가에 따라 범주가 달라진다. 따라서 부산의 문학을 부산 지역에 거주하면서 문학 작품을 쓴 작가와 부산을 대상으로 한 문학 작품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공통 영역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의 부산 문학]
고려조의 정서(鄭敍)가 지은 「정과정곡」을 첫머리에 둘 수 있을 것이다. 정서 이전에 역사와 야사가 전하는 문인은 최치원(崔致遠)[857~?]이다. 해운대와 신선대, 그리고 문창대 등 부산의 여러 명승지에서 그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을 읽을 수 있다. 정서를 제외하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부산 지역 출신이 지은 작품으로서 세상에 알려진 작품은 거의 없다.
조선 시대에 부산의 문학은 동래 부사나 통신사가 지은 제영(題詠)이 압도적이다. 그렇지만 인근 지역의 수령이나 경상도 관찰사 등이 지은 작품들이 있지만 대체로 해운대나 동래 온천을 유람하고 지은 제영 시문에 한정된다. 그 동안 부산 지역 문인으로 알려진 인물로는 어무적(魚無迹)과 정유길(鄭惟吉)[1515~1588], 김우정(金禹鼎)[1551~1630]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외에 대부분은 부산으로 부임한 관리나 인근으로 유배를 온 선비로서 부산의 풍정을 시문으로 읊고 있다.
어무적은 가덕도를 포함하는 웅천현 출신이므로 부산 지역 출신으로 분류되고 있다. 지금까지 그의 문집의 소재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으며 『동래부지(東萊府誌)』 제영잡저(題詠雜著)의 ‘해운대’조에 칠언 율시 1수가 전한다. 어무적은 일본에 가는 통신사가 그를 대동할 정도로 문명을 날렸다고 한다. 정유길은 동래 출신이다. 그는 1543년에 선위사, 1568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바 있다. ‘해운대’, ‘몰운대’, ‘천성’, ‘안골진’, ‘두모포’ 등의 부산 지역 제영시가 전한다. 동래의 사직동에 살았던 김우정은 임진왜란의 체험을 시문으로 남겼다. 이밖에 양산 사람인 백수회(白受繪)[1574~1642]가 일본에 잡혀가면서 지었다는 시조 「해운대 여흰 날에」가 있다.
동래의 현령 또는 부사로서 부산 지역의 명승이나 누정을 대상으로 제영 시문을 남긴 예는 임진왜란 직전에 부임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을 필두로 줄곧 이어진다. 동래는 1592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에 다시 부로 승격되었는데, 전란으로 인해 수령이 모두 무인으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1604년에 홍준(洪遵)[1557~1616]이 부사로 보임된 이후에는 줄곧 문인이 수령이 되었고, 이들에 의한 제영 시문도 많이 지어지게 되었다. 동래 부사를 역임하였거나 관찰사나 선위사 등으로 동래를 찾은 이들에 의한 제영 시문은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이들 제영 시문은 박사창(朴師昌)[1687~1741]이 1740년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동래부지』의 「제영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부산 인근의 수령이나 조선 통신사 사행단이 부산 지역 명승을 노래한 시문은 허다하다. 통신사행에 의한 부산 지역 제영 시문은 『해행총재(海行摠載)』에 다수 실려 전해지고 있다. 부산 지역을 관할했던 동래가 ‘동국의 봉래’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부산 지역은 절경이 많은 신선경으로 일컬어졌다. 자연히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문인 학사들이 부산을 찾아 승경과 고적을 상찬하며 시문을 남겼다. 부산의 승경 가운데 조선 전기의 문인 학사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역시 해운대이다.
최항(崔恒)[1409~1474]과 서거정(徐居正)[1420~1488], 성현(成俔)[1439~1504], 유호인(兪好仁)[1445~1494], 남효온(南孝溫)[1454~1492], 조위, 김극성, 김안국(金安國)[1478~1543], 어무적, 정사룡(鄭士龍)[1491~1570], 정유길, 황준량(黃俊良)[1517~1563], 고경명, 홍성민(洪聖民)[1536~1594] 등이 해운대에 대한 제영 시문을 남겼다. 다대포 인근에 위치한 몰운대는 다대포진이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그 절승도 더불어 주목받았다. 동래 온천과 정원루 역시 주된 제영의 대상이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과 성현(成俔)[1439~1504], 정사룡 등은 여러 편의 ‘온정(溫井)’ 관련 제영시를 남겼다.
전란 중에 부산 지역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제3자가 대신 창작한 작품들도 있다. 임진왜란 직후 부산의 모습을 담은 대표적인 고전 작품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내산록(萊山錄)」인데, 동래부와 주변 마을의 황폐한 모습과 전쟁의 참혹한 상흔이 잘 그려져 있다. 이에 앞서 시조 시인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 부산 인근에서 왜군과 싸운 후 본영에 돌아가 전쟁에 이긴 기쁨을 노래한 「태평사」를 지었다. 박인로는 그로부터 7년 후인 1605년에 경상 좌수영의 통주사로 부임해서 왜적과 대적했을 때를 회상하면서 144구로 된 「선상탄」이라는 가사를 짓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의 부산 문학과 관련하여 보다 주목할 만한 정현덕(鄭顯德)[1810~1883]의 작품은 총 117구로 이루어진 「봉래별곡」이라는 가사이다. 박인로에 의해 지어진 「태평사」와 「선상탄」도 부산과 관련이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봉래별곡」은 가사의 내용 전체가 금정산성에서 시작해서 범어사, 소하정, 유선대, 온정, 배산, 정원루, 안락 서원, 황령봉, 수영, 부산, 대마도, 해운대, 몰운대, 영가대, 왜관, 자성대, 정묘, 동평현터, 증대성, 구봉봉, 두모포, 초량, 객사, 대청, 연대청, 초량 왜관 동서관, 절영도, 태종대, 오륙도, 우암포 등을 망라하고 있어 그야말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산 찬가’라 할 수 있다.
[근대 전환기의 부산 문학]
개항으로 부산은 식민 도시(colonial city)로 다시 출발하게 된다. 이로써 동래 중심의 부산 문학은 개항 도시의 문화 체험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전환된다. 많은 기행서사가 외국인에 의해 쓰이기도 하는데, 부산의 문인이 부산을 노래하거나 서술한 경우는 많지 않다. 이 시기 부산 지역 출신 문인으로 박필채(朴苾彩)[1842~1925], 문성준(文聲駿), 양재일, 이광욱(李光昱) 등을 들 수 있으나 주로 제영시를 썼다. 특히 박필채는 15편의 개화 가사를 짓기도 했다. 양재일 역시 동명학교(東明學校)의 건립에 즈음하여 「보국단체가」와 「진보가」와 같은 개화 가사를 지었다.
부산 출신이 아니지만 부산을 노래한 이로 『조선근대명가시초』에 이름을 올린 강위(姜瑋)[1820~1884]가 갑신정변 직전에 일본에 가면서 「부산해승선」을 지어 감회를 읊은 바 있고, 개항기에 동래 부사로 근무하기도 했던 종두법의 전파자 지석영(池錫永)의 시문과 「대동속악부」를 지은 박치복(朴致馥)[1824~1894]의 「망해탄」 7수가 주목된다. 특히 「망해탄」에는 신문물의 유입을 바라보는 자신의 착잡한 심사가 담겨 있다.
식민 도시가 된 부산은 주체의 시각에 의해 재현되지 않는다. 외국인 여행자나 관리와 같은 타자들에 의해 그려진다. 이러한 부산이 식민지 조선의 작가들과 여행자들에 의해 재현되기 시작한다. 타자의 눈에 발견된 부산이 식민지 지식인인 작가의 글 속에 등장하는 것은 이인직(李人稙)[1862~1916]의 「혈의 누」[1906]가 처음이다. 확실히 부산의 성장은 철도와 연동되었는데, 경부 철도가 놓이면서 부산의 위상은 제국과 식민지 대륙을 잇는 결절지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무정』[1917]이 ‘관념적인 차원’에 머문 요인 가운데 하나가 관부 연락선이라는 제도적 장치와 부산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을 생략한 것이라는 지적이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부산을 “조선을 축사한 것, 조선을 상징한 것”으로 본 작가는 염상섭(廉想涉)[1897~1963]이다. 그만큼 식민지 근대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 더해진 셈이다.
이인직으로부터 염상섭에 이르는 궤적을 따라갈 때 부산의 근대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들의 시선들을 만날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인직의 「혈의 누」 하편을 시작으로 이해조와 최찬식(崔瓚植)[1881~1951]의 신소설에 등장한 부산은 염상섭의 「만세전」에서 매우 구체적인 형상을 보이게 된다. 그런데 내부자의 주체적 시선으로 재현한 부산은 많지 않다. 이 또한 부산이 지닌 해항 도시로서의 특성을 반영하는 대목일 것이다. 이동(mobility)은 근대 사회를 설명하는 주요 개념 가운데 하나이지만, 특히 해항 도시는 이러한 특성이 집약된 곳이다. 수많은 타자들에 의해 해항 도시가 다양한 시각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주체에 의한 재현은 없는가? 다행스럽게도 김열규(金烈圭)[1932~2013]의 『늙은 소년의 아코디언』이 내부자의 관점에서 해항 도시 부산을 경험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김열규는 일제 강점기의 체험과 해방 공간, 그리고 6·25 전쟁에 이르는 부산의 원도심을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지배와 저항이라는 추상에 가려진 해항 도시의 일상적 삶의 속살과 접할 수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이로써 여행자의 ‘조망적 시선’을 넘어서는 관점을 얻게 된다.
[부산의 근대 문학]
외국인과 일본인 여행객과 조선의 유학생에게 부산은 철도 여행의 한 경로에 불과하다. 서술자가 보이는 파노라마적 시선은 곧 제국의 시선과 겹쳐진다. 그러나 식민 도시를 바라보는 내부자의 시선은 이와 다르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식민 도시의 혼종성에 주목하고 있다. 서술자는 주인공 ‘이인화’를 자발적인 산책자로 만들어 식민 도시의 경계를 관찰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경계 영역과 주변부의 공간과 주거, 그리고 일상과 생활이 상당 부분 혼종화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산을 ‘식민지의 축도’라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내부자의 시선은 식민 도시의 구체성에 가 닿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비슷한 시기에 『동아 일보』 기자가 쓴 글인 「부산에서」도 나타난다. 영국인에게 맨체스터가 있고, 미국인에게 뉴욕이 있고, 일본인에게 오사카가 있듯이 조선인에게 부산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부심에는 본정에 이입된 조선인 상가에서 비롯한다. 상품의 유통과 화폐의 교환으로 이중 도시의 경계가 국면이다. 따라서 문화적인 혼종화는 필연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중 도시와 혼종화는 양자택일의 개념이 아니다. 이중 도시가 지니는 지배 양식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혼종화도 살피는 복안이 요구된다.
가령 1910년대 부평 시장을 예를 들 수 있다. 비록 일본인 중심 상가의 곁다리에 놓여진 경우가 많았지만 조선인 상가도 적지 않았다. 김열규의 회고에 의하면, 그의 집은 일본인 상가들이 즐비한 부평동 사거리에 있었다. “달랑 넷뿐”이었지만 조선인 상가 또한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식민 도시 부산은 차별이 내재한 공존의 공간이었다. 해항 도시였으므로 개방적인 문화 교섭이 가능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임화(林和)[1908~1953]의「상륙」[1938]은 부산과 영도를 그리고 있다. 중일 전쟁 이후 시기이다. 제국의 병참 기지가 되고 있는 영도의 서글픈 정경이 그려지고 있는 시이다.
광복은 제국의 질서가 붕괴됨과 동시에 한국이 국민 국가로 탄생하는 출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민자 일본인들의 귀환과 해외 한국인들의 귀환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귀환은 1945년 8월부터 그 이듬해 8월까지 계속된다. 특히 부산을 통한 귀환이 매우 빈번하였다. 재일 한인의 귀환과 조선 거주 일본인의 귀환이 부산항을 통해 이루어졌다. 부산과 경상남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하면 1845년 9월 28일부터 10월 4일까지 3만 7738명,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5만 6000명, 9월 28일부터 11월 15일까지 30만 명에 달했다는 귀환자 보고가 있다. 대체로 일본에서 들어온 귀환자는 95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여타 지역이 54만 명이라고 할 때 전체 귀환자 수는 150만 명으로, 당시 총 인구 1,400만의 10%를 넘는다.
국가 수립과 더불어 이어진 6·25 전쟁은 부산을 임시 수도이자 피난지로 바꾸어 놓는다. 김광균(金光均)[1914~1993]의 「영도 다리」는 피난 시절의 절실한 울림을 주는 시이다. 이호철의 「탈향」은 부산항과 부산진역 일대에서 전개되는 피난민의 삶을 그리고 있다.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곡예사」와 김동리(金東里)[1913~1995]의 「밀다원 시대」는 피난지 문인의 곤경과 좌절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이들 작가들은 내부자의 주체적 시선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내부자에 의한 부산 문학은 윤정규(尹正圭)[1937~2002]의 「불타는 화염」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은 중앙동 일대의 삶과 부산역 대화재 사건을 다룬다.
광복 전후 부산의 현대 문학을 이끈 이는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1908~1996], 향파(向破) 이주홍(李周洪)[1906~1987]등이고, 이들을 이병주(李炳注)[1921~1992]와 윤정규와 조갑상, 허만하(許萬夏)와 김규태(金圭泰)와 최영철 등이 잇고 있다.
통영 태생인 유치환과 양산 출신인 김정한은 함께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나와 각기 연희전문학교와 와세다대학교 유학 시절을 거치면서 1930년대 이후 부산 지역 문학에 영향을 끼쳐 왔다. 합천 태생인 향파 이주홍은 1940년대 말에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부산 문학의 한 흐름을 형성한다. 이들 세 문인은 각각 시, 소설, 아동 문학 영역에서 1950년대 이후부터 부산 문학을 이끄는 주역이 된다. 이들의 활동과 더불어 부산의 근대 문학은 제 모양을 갖추게 된다. 이들 이후 리얼리즘 소설, 해양 문학, 추리 문학, 모더니즘 시와 시학 등이 함께 발발하면서 부산의 문학은 해항 도시적·개방적인 특성을 문학적 활력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