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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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文學 |
영어의미역 | Literature of the Goryeo Dynast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임주탁 |
[정의]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하거나 부산 지역에서 창작된 문학 작품.
[변천]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한 고려 시대의 문학은 20여 편의 한문학 작품과 1편의 우리말 노래가 있다. 20여 편의 한문학은 주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동래현의 관아에 부속된 객사(客舍)에 머물렀던 문인들이 지은 시문들이고, 우리말 노래는 의종 때에 동래에서 귀양살이한 정서(鄭敍)가 지은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고려 시대 문학은 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동래현(東萊縣)’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헌에 의하면 다수의 문인들이 동래 온천, 해운대(海雲臺), 동래현의 객사, 적취정(積翠亭), 과정(瓜亭)과 관련한 시문을 남겼다.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정서의 아버지인 정항(鄭沆)[1080~1136]과 비슷한 시기[예종 조~인종 조]에 활동한 태학박사 곽동순(郭東珣)이 적취정을 배경과 제재로 삼아 지은 한시다. 하지만 이 한시 작품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또 학사 김정(金精)이 「적취정기(積翠亭記)」를 짓고, 최항(崔沆)의 사위 평장사 최유청(崔惟淸)[1095~1174]이 「적취정후기(積翠亭後記)」를 지었다고 하는데, 두 작품 역시 전하지 않는다. 결국 현재까지 전하는 고려 시대 문학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정서의 「정과정곡」인 셈이다.
「정과정곡」 이후 부산 문학의 자취는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이규보가 동래를 언제 들렀는지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다만 1202년인 35세에 청도 운문사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군대에 녹사(錄事)로 참여하였고, 그 무렵에 양주(梁州)[지금의 양산]를 거쳐 동래를 방문한 것으로 짐작된다. 「박공과 함께 동래 욕탕지로 갈 때 입으로 부르다[同朴公將向東萊浴湯池口占]」 2수[고율시]와 「동래에 와서 객사가 장려함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더니 박군이 고을을 맡았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하여 한참 감탄하다가 한 편을 지어 올리다[入東萊見客舍壯麗異常朴君言嘗典郡時所構嘆息良久因賦一篇奉呈]」[고율시]는 각각 동래 온천과 객사를 배경과 제재로 삼아 지은 작품이다.
이규보 이후에는 박효수(朴孝修)[?~1337], 안축(安軸)[1282~1348], 정포(鄭誧)[1309~1345], 정추(鄭樞)[1333~1382] 등 다수의 문인들이 동래에 머물렀던 경험을 시로 남겼다. 다만 그 제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정포의 「동래잡시(東萊雜詩)」, 정추의 「동래공관(東萊公館)」, 「동래회고(東萊懷古)」 등 너덧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특징]
고려 시대 부산의 문학은 동래를 중심으로 한 부산 지역의 자연환경과 고적(古跡)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특히, 동래는 고려의 최변방(最邊方)이었고, 따라서 이들 문인들이 동래를 방문한 계기는 주로 유배(流配)나 좌천(左遷)에 있었기 때문에 동래 지역을 들른 문인이 남긴 시문학 속의 동래는 선계(仙界)로 형상화되기 일쑤였다. 금정산에서 해운대로 이어지는 자연환경 자체가 예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비경이었기도 하지만, 선계의 형상화는 적강(謫降) 모티프[천상계의 신선이 죄를 지어 인간 사회로 내려와 죄 값을 치르고 천상계로 복귀하는 이야기]의 수용이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적강 모티프는 내직(內職)에 있던 문인들이 변방으로 유배 또는 좌천되거나 변방 지역을 방랑할 때 즐겨 수용하였던 문학 관습이다. 동래현이 속한 울주(蔚州)에 유배를 왔던 정포나 동래 현령으로 좌천되었던 정추가 동래의 자연환경에 선계 이미지를 부여하고 신선의 자취가 서려 있는 고적을 찾아 시를 남긴 것은 그러한 문학 관습을 적극 수용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관습의 수용은 그 유래가 고려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동래 객사에 딸린 적취정[정포, 안축, 정포의 시], 소하정[정포, 정추의 시], 겸효대, 해운대[정포의 시] 등이 모두 자칭 혹은 타칭 신선[적선(謫仙): 인간 사회에 유배된 신선]이었던 인물들과 관련한 고적이기 때문이다.
정서를 충신, 「정과정곡」을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충신이 군주를 염려하고 그리는 노래]’로 평가하게 되는 근원적인 계기도 유배나 좌천을 통해 동래에서 머물렀던 문인들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스스로 충신, 곧 천상계로 복귀해야 하는 신선으로 인식한 데서 「정과정곡」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기록상 확인되는 최초의 동래 현령이었던 홍간(洪侃)[?~1304] 역시 이와 같은 공감을 바탕으로 충신의 형상으로 수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정포의 「동래잡시」].
[고중지의 작품]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문인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고중지(高中址)의 「경상도로 안찰 나가는 직랑 최함일을 보내며(送崔咸一直郞出按慶尙)」[오언 고시]가 전한다. 이 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서울[개성]에서 지은 것인데 동래 지역의 자연환경과 문화 유적을 가장 체계적으로,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 놓고 있고 있으므로 전문을 소개한다.
금정산고고(金井山高高)[금정산은 높고 높아]
암만사천목(巖巒似天目)[바위 봉우리 천목산 같지요]
하유동래성(下有東萊城)[그 아래 있는 동래성]
연하서고목(煙霞棲古木)[연기와 노을이 고목에 서렸지요]
세칭신선거(世稱神僊居)[세상에서 신선(神仙) 사는 곳이라 말하듯]
지청인불속(地淸人不俗)[땅은 맑고 사람은 속되지 않았지요]
백일운기증(白日雲氣蒸)[한낮에도 구름 기운 피어오르고]
탕천용산곡(湯泉涌山谷)[온천(溫泉)은 산골짝에서 샘솟지요]
행려관기방(行旅館其傍)[나그네들 그 곁에 묵으며]
방동득수목(方冬得漱沐)[겨울에도 목욕을 할 수 있지요]
야교압평호(野橋壓平湖)[들 다리는 평평한 호수를 누르고]
소정의단록(小亭依斷麓)[작은 정자는 끊어진 산기슭에 기대섰지요]
운석소하권(云昔蘇嘏倦)[옛날 소하 신선이]
내유기백록(來遊騎白鹿)[흰 사슴을 타고 와서 놀았다지요]
객사수소영(客舍誰所營)[객사는 그 누가 지었는지]
장관천하독(壯觀天下獨)[장관이 천하제일이지요]
북헌명적취(北軒名積翠)[북쪽 마루 이름은 적취(積翠)인데]
일면천간숙(一面千竿玊)[한 쪽은 천 줄기 옥[玉: 죽(竹)]이지요]
월야매초한(月夜梅梢寒)[달밤엔 매화가지 차갑고]
추풍귤유숙(秋風橘柚熟)[가을바람엔 귤(橘)과 유자[柚] 익지요]
동망고운대(東望孤雲臺)[동으로 바라보면 고운대]
삽해취봉촉(插海翠峯矗)[바다에 솟은 푸른 봉우리 뾰족하지요]
잠시기유상(暫時寄遊賞)[잠깐을 노닐어도]
평생심의족(平生心意足)[한평생 마음에 흐뭇하지요]
아본개중인(我本箇中人)[나는 본래 그 곳 사람]
장강요모옥(長江遶茅屋)[긴 강이 초가를 감돌아 흐리지요]
유학공명류(謬學功名流)[그릇 공명(功名)을 배워]
진토공록록(塵土空碌碌)[흙먼지 속에서 하릴없이 살고 있지만]
지금청몽리(至今清夢裏)[지금도 꿈속에서는]
요상창랑곡(遙想滄浪曲)[멀리 차가운 물굽이를 그려 보지요]
재배송황화(再拜送皇華)[재배하고 황화(皇華)를 보내오니]
위아호송국(爲我護松菊)[날 위해 솔과 국화는 보호해 주시오]
고려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고중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최함일(崔咸一)이 1290년(충렬왕 16)에 급제하였으므로 그 전후에 급제한 인물이었으리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중지는 이 시에서 금정산에서 해운대에 이르기까지 동래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명소[금정산, 동래산성, 동래 온천, 소하정, 동래 객사, 적취정, 해운대 또는 고운대]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고향 동래가 신선과 같이 속되지 않은 인간이 사는 곳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최일함도 잠깐이라도 머물며 자기와 같은 경험을 공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보인다.
[의의와 평가]
고려 시대의 문학은 동래가 부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해 주는 동시에, 부산을 문학 공간으로 재탄생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문학 공간으로서의 부산 동래는 외지인의 문학에서는 충신이 억울하게 쫓겨 와서 머무는 공간 혹은 천상계에서 쫓겨 난 신선이 머무는 공간으로 그려졌다면, 이곳 출신의 문학에서는 수려한 자연 경관과 찌든 마음을 씻을 수 있는 명소를 가지고 있어 머물 만한 공간으로 그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전하는 고려 시대 문학에서 부산이라는 문학 공간이 외지인의 시각에 의하여, 혹은 그에 견인된 시각에 의하여 만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부산을 생활 근거지로 하는 문인이 부산에서 창작한 작품이 전혀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