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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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誧 |
영어음역 | Jung Po |
이칭/별칭 | 중부(仲孚),설곡(雪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용범 |
[정의]
고려 후기 동래의 여러 정경을 시로 남긴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할아버지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瑎)이고, 아버지는 판선공(判繕工) 정책(鄭責)이다.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며, 아들은 정추(鄭樞)이다.
[활동 사항]
정포(鄭誧)[1309~1345]는 1326년(충숙왕 13) 과거에 급제하였고, 얼마 뒤 예문 수찬으로 원나라에 표(表)를 올리러 가다가 마침 원나라에서 귀국 중이던 충숙왕을 배알하게 되어 총애를 받았다. 충혜왕 때 전리 총랑(典理摠郞)에서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었으나, 당시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자 상소하였다가 도리어 파면되었다. 이때 어떤 이가 정포가 원나라로 망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여 끝내 울주(蔚州)[지금의 울산]로 유배당하였다.
유배 중에도 오히려 태연자약하여 활달한 장부의 기질을 잊지 않고 풍류 생활을 즐겼다. 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원나라 승상인 베케부카[別哥不花·別哥普化]가 정포를 보고 매우 호감을 가져 원나라 황제에게 추천하였으나, 그 뒤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문선(東文選)』에는 동래와 관련된 「동래 잡시(東萊雜詩)」라는 연작시가 전하는데, 아마도 정포가 울산으로 유배되던 기간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를 통해 고려 후기 동래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시에서는 동래 관아, 소하정(蘇嘏亭), 해운대, 적취헌(積翠軒), 동래 온천, 화도(花島)의 풍경들과 충렬왕 때 동래 현령으로 부임한 홍간(洪侃)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씨라는 수령의 선정(善政)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시에 의하면 동래의 관아는 매화 언덕에 의지해 있고, 민가는 온천천을 따라 죽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하정에 대해서는 옛날 신선이 놀았다는 전설과 그 터가 동래 관아의 동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해운대에 대해서는 터조차 없이 황폐하다고 하였는데, 동래 관아에서 해운대에 이르는 수영강 연변에는 민가가 죽 늘어서 있는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또 동래의 객관인 적취헌의 풍경은 산자락에 연하여 대나무로 둘러싸여 있음을 전하고, 동래 온천에 대해서는 2년 동안 토질로 고생하다가 반나절의 목욕으로 속진을 다 씻었다고 할 정도로 효험이 좋았음을 읊고 있다.
한편 화도는 현재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지만 나비가 떼를 지어 날고, 작은 못에는 물고기가 뛰어논다는 표현을 보면 누정이 있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배 타고 물 구렁을 찾아가기도 하고, 지팡이 짚고 언덕에 올라보기도” 하였다는 표현을 보면 정포는 동래의 곳곳을 누비면서 그 경치의 아름다움과 동래 사람들의 인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과 저술]
정포는 최해(崔瀣)의 문인으로 이곡(李穀) 등과 사귀며 시문과 글씨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다. 그러나 문집인 『설곡 시고(雪谷詩藁)』가 전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문학과 사상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제현이 쓴 「설곡 시서(雪谷詩序)」에서 정포의 불행하였던 일생에 대하여 애석해하는 글귀들이 나타나는바, 이를 통하여 그의 인물됨과 재식(才識)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색의 「설곡 시 고서(雪谷詩藁序)」에서 정포의 시를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않아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를 하나도 쓰지 않았다”라고 하여 높은 수준의 시경(詩境)을 성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