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정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1688
한자 鄭敍
영어음역 Jeong Seo
이칭/별칭 사문(嗣文),과정(瓜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6-2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정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시인
성별
본관 동래
대표관직|경력 내시낭중
활동 시기/일시 1151년연표보기 - 동래에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157년 - 거제도로 옮겨짐
활동 시기/일시 1170년 - 해배
추모 시기/일시 1974년 - ‘정과정 옛터’ 표짓돌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4년 - 정과정곡 비 건립
추모 시기/일시 1985년 - 정과정곡 비 건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3년 5월 6일연표보기 - 정과정 유적지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됨
출생지 개경 - 경기도 개성시
거주|이주지 동래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6-2지도보기
관련 유적 수영 하수 처리장 체육 공원 부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2동 1108지도보기
관련 유적 수영구 망미동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4-7
관련 유적 정과정 유적지 - 부산광역시 수영구 망미동 산6-2지도보기

[정의]

고려 전기 부산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아명은 사문(嗣文), 호는 과정(瓜亭). 증조할아버지는 정문도(鄭文道)이고, 할아버지는 정목(鄭穆)[1040~1105]이다. 정목은 젊은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여 세도가인 고익공(高益恭)의 사위가 되고, 관등이 3품까지 올라 문벌 가문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아버지는 정항(鄭沆)으로, 숙종(肅宗) 때 종2품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숙종을 옹립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국모(王國髦)의 딸이다. 부인은 재상 임원후(任元厚)의 딸이며, 인종(仁宗)의 비인 공예 태후(恭睿太后)의 동생이다. 동래 정씨는 대대로 동래 지역의 호장(戶長)을 지낸 집안이다.

[활동 사항]

정서(鄭敍)는 개경에서 출생하여 귀하게 자랐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 가도를 달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젖 떨어질 때부터 글을 지었다”[임춘(林椿) 『서하집(西河集)』], “재능과 기예가 있었다”[『고려사(高麗史)』]라는 기록이 보일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고, 묵죽화도 잘 그렸다. 정서는 고관인 아버지의 배경으로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인종의 총애 속에 10년 동안 승진을 거듭하여 임금이 승하한 1146년에는 벼슬이 정5품 내시낭중에 이르렀으나 의종(毅宗)이 즉위한 후 처지가 바뀌었다.

의종에게는 왕경(王暻)[대령후(大寧侯)], 왕호(王號)[후에 명종], 왕충희(王冲曦)[원경국사(元敬國師)], 왕탁(王晫)[후에 신종] 등 4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정서는 그중 왕경과 친했다. 1151년(의종 5) 환관 정함(鄭諴) 등이 “대령후를 임금으로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민 자들이 있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의종왕경의 지위를 박탈하여 귀양을 보냈고, 정서도 모반 사건에 엮여 동래로 귀양을 갔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여러 자료에 따르면, 정서가 귀양살이를 한 곳은 동래현 남쪽 10리[4㎞], 좌수영[지금의 수영]에서 북쪽으로 3리[1.2㎞] 떨어진 강기슭이다. 지금의 수영 하수 처리장~고려제강에 이르는 지역다. 정서는 강변에 정자를 세우고 오이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과정이라는 호를 붙였다.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정서의종을 그리며 망산(望山)[망미 주공 아파트가 있는 산]에 올라가 개경이 있는 배산 쪽을 향해 잔을 올리고 절을 하였다. 귀양을 떠날 때 “이번 일은 부득이한 것이니, 곧 풀려날 것이다”라는 임금의 말을 굳게 믿었으나 5년이 넘도록 부름이 없자, 애타는 심정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노래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정서가 지은 정자를 정과정(鄭瓜亭)이라고 하고, 정서가 불렀던 노래에 「정과정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서는 동래에서 6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정서의 귀양 생활에 대해 농사를 지으며 곤궁하게 살았다는 설과 고향에 경제적 기반이 있어 여유롭게 살았다는 견해로 나뉘는데, 동래 정씨가 부산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만큼 후자의 견해가 맞을 듯하다. 1157년(의종 11) 임금이 첫 왕자를 얻은 기념으로 많은 죄인을 풀어 주었으나 정서는 오히려 더 먼 거제도로 옮겨졌다. 환관 세력이 문관을 완전히 쫓아내려는 권력 투쟁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1170년 무신정변(武臣政變)으로 의종이 시해되고, 명종(明宗)이 즉위한 후 정서는 19년의 귀양살이를 끝내고 개경으로 돌아갔다.

[학문과 저술]

「정과정곡」의 가사는 『고려사』 「악지(樂志)」에 실려 있다. 노래를 지은 시기는 정서가 동래를 떠나기 직전인 의종 10년(1156)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악지」에는 노래를 지은 연유와 함께 이제현(李齊賢)의 한역시가 실려 있다. 16세기 성현(成俔)이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한글 가사가 있으며, 18세기에 편찬된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악보도 전한다. 「정과정곡」은 조선 시대 때 궁중 아악으로 연주되었으며, 악공(樂工)을 선발할 때 필수 시험 과목이었다. 그 밖에 3권으로 된 시화집 『과정 잡저(瓜亭雜著)』가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상훈과 추모]

부산 지역 두 곳에 정과정곡 비가 있다. 1974년 부산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1-4번지[현 경동레미콘 자리]에 정과정 옛터라는 표짓돌을 세우고, 1984년 그 옆에 정과정곡 비를 세웠다. 1994년 수영 하수 처리장 확장 공사를 위해 표짓돌과 비석을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임시로 옮겼다가 1998년 공사가 끝난 후 수영 하수 처리장 옥상 체육 공원 부지에 다시 세웠다.

또 하나는 토향회(土鄕會)와 정과정비건립추진회에서 세운 것이다. 연산동의 표짓돌과 비석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85년 정서가 귀양살이를 할 때 개경 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는 곳[수영구 망미2동 4-7]에 새 비석을 세웠다. 정서가 유배 생활을 했던 지역[수영구 망미2동 산6-2]은 정과정 유적지로 조성되고, 2003년 5월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연제구에서는 연산1동과 연산8동을 잇는 도로는 과정로, 배산 언덕 아래 옛 정과정 인근 초등학교는 과정초등학교[1985년 3월 1일 개교], 정서의 유적지가 분포된 온천천의 연산교와 망미교 사이 구간은 과정천, 수영 교차로~토곡~안락 로터리는 정서로라고 이름 짓는 등 각종 시설과 도로명을 정서와 관련된 명칭으로 바꾸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학* 정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찾기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 부산의 역사와 함께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 답변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8.12.04
정** [가계]
첫째줄의 {증조할아버지는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시조인 정문도(鄭文道)이고,}를 [ 증조할아버지는 정문도(鄭文道)이고,]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증조할하버지가 동래정씨 2세이옵니다.
셋째줄의 {정항(鄭抗)}을 [정항(鄭沆)]으로 수정하여 주십시오 할아버지의 휘자는 沆입니다.

정항(鄭沆)
상세정보 자료수정내역 [ 원문이미지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적하신 사항은 수정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9.01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