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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00
한자 古典文學
영어의미역 Classical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임주탁

[정의]

조선 시대까지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창작한 문학 작품.

[개설]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창작한 문학 작품은 크게 고려 시대 이전과 조선 시대의 작품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고려 시대 이전 부산을 배경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한 작가들은 주로 유배객이거나 동래현에 파견된 관료들이었다. 지방관으로 파견된 이들도 스스로 좌천되었다고 인식하였기에 유배객들과 정서적으로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문학 작품은 정계(政界)에서의 소외라는 상황에 대한 자기 인식을 부산의 산수와 풍속을 매개로 표현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조선 시대 이후의 고전 문학은 고려 시대 이전의 고전 문학의 특성을 일정하게 계승하면서 부산이 유구(琉球)나 일본으로 통하는 외교적 관문이라는 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외교 사신이 창작한 작품에는 부산의 명소(名所)를 매개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 객수(客愁)[타지에서 느끼는 걱정]가 겹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이후에 부산의 고전 문학은 유배객, 지방관에 더하여 일본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의 문학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부산을 충절(忠節)의 고장으로 형상화하는 특징이 있다. 승경과 명소에 묻어 있는 상흔을 통해 전란을 회억(回憶)[지나간 일을 추억함]하면서 애국적 행동을 보인 인물을 기리며 애민·애국하는 마음을 되새기는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전 문학을 통해 부산은 외부, 특히 일본[倭]으로부터 국가 사회를 지키는 보루(堡壘)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고려 시대 이전의 고전 문학]

고려 시대 이전의 고전 문학은 주로 유배객과 좌천 관료에 의해 창작되었다. 이들의 정서적 태도는 크게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정서(鄭敍)의 「정과정곡(鄭瓜亭曲)」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소외된 상황에서 적극 벗어나고자 하는 태도요, 다른 하나는 마치 선계(仙界)에 노니는 신선이 된 듯이 부산의 승경과 명소를 유람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태도다.

유숙(柳淑)[1324~1368], 정포(鄭誧)[1309~1345], 정추(鄭樞)[1333년~1382] 등은 전자와 같은 정서적 태도에 공감하면서도 후자와 같은 정서적 태도를 보인 작가들이다. 정서를 제외한 유배객이나 동래현에 파견되거나 경상도에 파견되어 동래현을 지나는 지방관들은 주로 동래현 관부(官府)를 중심으로 금정산~해운대(海雲臺), 몰운대(沒雲臺)~태종대(太宗臺)를 잇는 선 위에 있는 승경과 명소들을 공간 혹은 대상으로 삼아 문학을 창작하였다. 이들 승경과 명소들은 신라 선인(仙人)의 자취가 묻어 있는 선경(仙境)으로 그려졌다.

실제 동래(東萊)[동쪽 봉래(蓬萊)]현의 관부에 딸린 여러 가지 시설물들은 그 선인들의 자취를 그리며 지어진 것들이다. 소하정(蘇蝦亭), 적취정은 물론 겸효대(謙孝臺) 등은 모두 옛날 신선을 기리며 지은 시설물들이다. 이러한 시설물들을 직접 유람(遊覽)하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적강(謫降)한 신선이라 여겼다. 적강한 신선은 곧 천상계에 대응하는 중앙 정계로 돌아갈 신선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모든 작품의 창작에 적강 모티프를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다. 정포의 『동래 잡시(東萊雜詩)』와 정구의 『동래 회고(東萊懷古)』는 고려 시대 유배객과 좌천 관료의 정서적 태도와 문학적 형상화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선 시대의 고전 문학]

부산은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시대 문인들에 의해 부산은 선계(仙界)와 같은 변방(邊方)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왜구의 출몰이 잦아지고 외교 사절이 나다니면서 부산은 국방(國防) 요새(要塞)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이 함락되면서 동래 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되었던 부산은 동래현으로 강등된다.

지위가 강등된 동래현이 다시 동래 도호부로 승격[1599]되면서 동래 부사로 파견된 윤훤(尹喧)[1573~1627], 이춘원(李春元)[1571~1634], 이안눌(李安訥)[1571~1637] 등은 전란으로 멸실된 시설물을 복원하는 한편 송상현(宋象賢)[1551~1592] 등 전란에 순절한 인물들을 기리는 시설물들을 신축하였다. 또한 겸효대를 비롯하여 멸실된 시설물들의 역사를 회억(回憶)하거나 전란의 참상과 충절을 지켜 순절한 인물들의 행적을 드러내는 작품을 지었다.

윤훤의 「내주 잡영(萊州雜詠)」, 이춘원의 「차래주 잡영(次萊州雜詠)」, 이안눌「내산록(萊山錄)」은 전란 이전의 승경과 명소들이 전란으로 멸실된 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작품이다. 또한 신흠(申欽)[1566~1628]의 「송동래전(宋東萊傳)」, 허목(許穆)[1595~1682]의 「동래노파[東萊嫗]」같이 전란 중에서도 충과 효의 윤리를 실천한 인물의 행적을 서술한 전기가 지어지기도 하였다. 정현덕(鄭顯德)[1810~1883]의 「봉래 별곡(蓬萊別曲)」[1869]은 17세기 초에 파견된 동래 부사들이 일구기 시작한 문학적·정신적 유산을 국문 가사로 고스란히 계승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통신 외교가 활발해지면서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사행 문학이 창작되기 시작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을 건너가기 이전이나 다녀온 이후에 부산에 머물면서 부산의 승경과 명소를 배경으로 자신의 소회를 표현하였다. 윤순지(尹順之)[1591~1666]의 「내산 만점(萊山謾占)」과 「유부산 만점(留釜山謾占)」[1643], 신유(申濡)의 「다대포 우중(多大浦雨中)」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통신사 일행이 주로 머물던 곳은 충렬사(忠烈祠), 정원루(靖遠樓), 온정(溫井)이며, 이들이 손꼽은 부산의 3대 명소는 영가대(永嘉臺), 몰운대, 해운대였다. 특히 몰운대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정운(鄭運)의 순절비가 세워진 곳인 동시에 대마도로 통하는 바닷길의 출발지였기 때문에 이곳을 배경으로 하는 시문이 많이 남아 있다. 통신사 일행은 부산의 승경과 명소를 매개로 불안한 마음을 다잡고 애국하는 마음을 되새기며, 다른 한 편으로는 선경과도 같은 빼어난 경치를 구경하며 객수를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 이전에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창작된 문학 작품은 첫째, 부산 지역의 국가 내 위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 시대까지 부산 지역은 국가 사회의 최변방 가운데 하나로만 인식되었으며, 조선 시대 들어서는 중대한 외교적 통로로서, 또 외부로부터 국가 사회를 수호하는 보루로 인식되었다.

둘째, 문화 공간으로서의 부산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고전 문학 작가들이 문학적 공간 혹은 대상으로 삼은 자연 경관[승경]과 명소[각종 시설물]는 시대 변화에 따라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한 특성은 고전 문학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적으로 남은 명소들까지도 그 연원과 역사를 아울러 일러주고 있다. 따라서 고전 문학 작품들은 공시적·통시적 관점에서 부산의 문화 지형도를 그리는 데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셋째, 부산 지역[자연 경관이나 명소]에 부여된 문학적·문화적 의미는 지역민의 시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각에 의한 것임을 말해 준다. 부산의 고전 문학 가운데 부산 지역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유배객, 파견 관료, 통신사 일행 등 부산의 고전 문학 작품의 작가는 대부분 부산 지역에 단기간 체류한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의 고전 문학은 문학 혹은 문화의 ‘지역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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