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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22
한자 朝鮮後期-文學
영어의미역 Literature of the Late Joseon Dynasty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사항 시기/일시 조선 후기
관련 장소 조선 후기의 문학 - 부산광역시 일대

[정의]

조선 후기에 부산 지역을 배경으로 하거나 부산 지역에서 창작된 문학 작품.

[개설]

부산의 조선 후기 문학은 임진왜란으로 야기된 적개심의 고조와 전쟁 체험, 그리고 쇄환사로 일본을 왕래한 이들이 부산 체류 등을 노래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에도 통신사가 일본으로 가기 전 순풍을 기다리며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해운대, 태종대, 영가대(永嘉臺), 몰운대(沒雲臺), 범어사(梵魚寺) 등의 주변 명승을 유람하면서 시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해행총재(海行摠載)』에 실려 있는 다수의 부산 관련 시문들이 그러하다.

부산의 조선 후기 문학에서 임진왜란 및 일본과 관련된 시문과 쌍벽을 이루는 것은 동래 부사를 역임한 이들에 의한 제영 시문이다. 이들 시문은 대체로 『동래읍지』의 ‘제영(題詠)’조와 『부진제영(釜鎭諸詠)』 등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달리 부산 인근 지역에 유배 와서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지은 시문들도 있다. 19세기 초 김해에 유배된 후 부산에 들러 왜관과 부산 등을 읊은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시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811년의 신미사행 이후 통신사의 부산 체류와 관련된 시문의 찬작(撰作)은 끊겼지만, 개항기 이후 수신사(修信使)를 비롯한 사신들의 왕래가 재개됨에 따라 이들에 의한 시문의 찬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부산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많은 지식인과 관료들이 부산을 찾아와 지은 시문들도 적지 않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담긴 시가와 산문]

임진왜란 직후 부산의 모습을 담은 대표적인 고전 작품은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내산록(萊山綠)』이다. 『내산록』은 이안눌이 1607년(선조 40)에 동래 부사로 부임한 뒤 이임하여 서울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노정과 견문을 276수의 시로 읊은 것이다. 이 가운데 217수가 부산에서 지어졌다. 「내산록」의 「입동래부(入東萊府)」, 「제동헌벽상(題東軒壁上)」, 「제기장현(題機張縣)」 등에는 동래부와 주변 마을의 황폐한 모습과 전쟁의 참혹한 상흔이 잘 그려져 있다.

이에 앞서 시조 시인 박인로(朴仁老)[1561∼1642]는 1598년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성윤문의 막하에 있으면서 부산 인근에서 왜군과 싸운 후 본영에 돌아가 전쟁에 이긴 기쁨을 노래한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박인로는 그로부터 7년 후인 1605년(선조 38)에 경상 좌수영의 통주사(統舟使)로 부임해서 왜적과 대적했을 때를 회상하면서 144구로 된 「선상탄(船上嘆)」이라는 가사를 지었다.

동래의 사직동에 살았던 김우정(金禹鼎)[1551∼1630]은 임진왜란 당시 자신의 피로(被虜) 체험을 시문으로 남긴 몇 안 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이다. 김우정은 일본에 억류되어 있을 때에 장문포(長門浦)에서 강항(姜沆)[1567~1618]과 함께 머물기도 했는데, 이때의 회포를 읊은 시인 「장문포여강수은항논회(長門浦與姜睡隱沆論懷)」가 그의 문집인 『해수선생문집(海叟先生文集)』에 실려 전한다. 양산 사람인 백수회(白受繪)가 일본에 잡혀가면서 지었다는 시조 「해운대 여흰 날에」도 주목할 만하다.

전란 중에 부산 지역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제3자가 대작한 작품들도 있다. 허목(許穆)[1595∼1682]이 지은 「동래구(東萊嫗)」와 임환원[1638∼1697]이 지은 「동래양부하전(東萊梁敷河傳)」이 그것이다. 이밖에 왜적에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정발(鄭撥)[1553∼1592]과 송상현(宋象賢)[1551∼1592], 윤흥신(尹興信)[?∼1592] 등의 충절을 기린 작품들도 적지 않았는데,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지은 「동래남문비기(東萊南門碑記)」와 「송부사행장(宋府使行狀)」, 신흠(申欽)[1566∼1628]의 「송상현전(宋象賢傳)」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목민관·통신사의 승경(勝景) 상찬(賞讚) 시문]

부산의 모체가 된 동래는 1592년(선조 25)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99년(선조 32)에 다시 부(府)로 승격되었는데, 전란으로 인해 수령이 모두 무인으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1604년(선조 37)에 홍준(洪遵)[1557∼1616]이 부사로 보임된 이후에는 줄곧 문인이 수령이 되었고, 이들에 의한 제영 시문도 많이 지어지게 되었다. 동래 부사를 역임하였거나 관찰사나 선위사 등으로 동래를 찾은 이들에 의한 제영 시문은 일일이 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데, 이들 제영 시문은 박사창(朴師昌)[1687∼1741)이 1740년(영조 16)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동래부지』의 「제영잡저(題詠雜著)」에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윤훤(尹暄)[1573∼1627, 1605 부임], 이춘원(李春元)[1571∼1634, 1607 부임], 이안눌[1608 부임], 성진선(成晋善)[1557∼?, 1611 부임], 이원진(李元鎭)[1594∼?, 1644 부임], 이중협(李重恊)[1681∼?, 1725 부임], 권부(權孚)[1662∼?, 1727 부임] 등이 비교적 많은 제영 시문을 남겼다.

이밖에 접위관(接慰官)이나 선위사(宣慰使) 또는 관찰사(觀察使) 등으로 부산 지역에 들렀다가 제영 시문을 남긴 이들도 많다. 선위사로서는 이지완(李志完)[1575∼1617]과 이민구(李敏求)[1589∼1670]가, 접위관으로서는 최수범(崔守範)[1690∼?]과 이정제(李廷濟)[1670∼1737] 등이 많은 시문을 남겼다. 특히 이정제는 「봉래팔영(蓬萊八咏)」을 지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고, 최수범은 「내주잡영(萊州雜詠)」을 지었다고 하나 그 일부만이 『동래부지』의 「제영잡저」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에 대한 기문도 남겼는데, 이민구가 「영가대기(永嘉臺記)」를, 권부가 「영가대기」와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이중협이 「관주헌기(䝺籌軒記)」와 「읍승정기(揖升亭記)」, 「성신당기」 등을 남겼다. 권부와 이중협이 기문을 남긴 성신당에는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우삼방주(雨森芳洲)가 기문을 지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일본 사행(使行)의 명칭도 ‘회답겸쇄환사’에서 ‘통신사’로 바뀐 뒤, 사행단이 제술관(製述官)과 서기(書記)는 물론 의관 및 역관까지도 시문 창화에 능한 이들로 채워짐에 따라 이들에 의한 부산 지역 명승의 제영도 잇따르게 되었다.

홍세태(洪世泰)[1653∼1725]의 「부산가(釜山歌)」와 신유한(申維翰)[1681∼?]의 「해운쌍유도발(海雲雙遊圖跋)」과 「차자미백제성방선시42운(次子美白帝城放船詩四十二韻)」, 신유(申濡)[1610∼1665]의 「차부산관(次釜山舘)」과 「초량우중(草梁雨中)」 「다대포우중(多大浦雨中)」, 조경(趙絅)[1586∼1669]의 「영가대」 등이 그 예이다. 통신 사행에 의한 부산 지역 제영 시문은 『해행총재』에 다수 실려 전해지고 있다.

[김해 유배객 이학규와 지역 작가의 시문]

고려 속요 「정과정곡」은 정서(鄭敍)[생몰년 미상]의 동래 유배의 산물이다. 조선후기에 부산 인근 지역에 유배 온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윤선도(尹善道)[1587∼1671], 권적[1675∼1755], 유척기(兪拓基)[1691∼1767], 이학규 등이 있다. 윤선도권적은 기장에 유배되었고, 유척기는 동래에, 이학규는 김해에 유배되었다. 이 가운데 이학규를 제외한 나머지 문인들은 유배 기간이 짧았던 때문인지 부산 지역과 관련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고 있지 않다.

이학규는 서울 사람이지만 1801년에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김해로 유배되었고, 1824년에 유배에서 풀린 뒤로도 줄곧 서울과 김해를 왕래하며 생활하였다. 생애의 절반을 김해에서 거처한 셈이니, 출생지는 서울이라 하나 김해 사람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학규는 김해에 살면서도 부산과 낙동강 하구와 관련된 시문을 많이 지었는데, 「초량왜관사(草梁倭館詞)」 20수와 「부산방선사(釜山放船詞)」 7장, 「전포행(前浦行)」 14수, 「후포행(後浦行)」 18수, 「남호어가(南湖漁歌)」 10수, 「명지도즉사(鳴旨島卽事)」 2수 등이 그것이다.

이학규는 부산과 동래의 문인들과도 교유하면서 이와 관련된 시문을 남겼다. 이학규가 교유한 부산 지역 문인으로는 윤사혁(尹師赫)과 김이원(金彛源), 이사순(李思淳), 변진위(邊振緯), 김종복(金宗福), 이순엽(李恂曄) 등이 있으며, 이들과 관련된 상당수의 시문들이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에 실려 전한다. 『낙하생전집』에는 이밖에 정묘(鄭墓), 온천(溫泉), 초량(草梁), 영가대, 만공기공비(萬公紀功碑), 최장군묘(崔將軍廟) 등 부산 지역의 고적을 읊은 시들이 실려 있다.

이학규에 비해 후대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1867년에 동래 부사로 부임해서 지역 문단의 진흥에 일조한 정현덕(鄭顯德)[1810∼1883]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정현덕의 시는 박문규, 강위(姜瑋)[1820∼1884], 김윤식(金允植)[1835~1922], 이건창(李建昌)[1852~1898], 곽종석(郭鍾錫)[1846∼1919], 황현(黃玹)[1855~1910] 등의 시와 함께 오세창(吳世昌)[1864∼1953]이 편찬한 『조선근대명가시초(朝鮮近代名家詩鈔)』에 78수가 실려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개항기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다. 여기에는 삼성대(三姓臺), 도화동(桃花洞), 정원루(靖遠樓), 범어사, 몰운대, 온천(溫泉), 선암사(仙巖寺) 등과 같이 부산의 명승고적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부산 문학과 관련하여 보다 주목할 만한 정현덕의 작품은 「봉래별곡(蓬萊別曲)」이라는 가사이다. 박인로에 의해 지어진 「태평사」와 「선상탄」도 부산과 관련이 있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봉래별곡」은 가사의 내용 전체가 금정산성에서 시작해서 범어사, 소하정, 유선대, 온정, 배산, 정원루, 안락서원, 황령봉, 수영, 부산, 대마도, 해운대, 몰운대, 영가대, 왜관, 자성대, 정묘, 동평현 터, 증대성(甑臺城), 구봉봉(龜峰烽), 두모포, 초량, 객사, 대청, 연대청, 초량 왜관 동서관, 절영도, 태종대, 오륙도, 우암포 등을 망라하고 있어 그야말로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부산 찬가’라 할 만하다.

[개항기의 부산 문학]

개항기에는 부산이 일본과의 인적, 물적 왕래의 중심이 된 때문으로 일본과의 외교와 통상의 일로 부산을 찾는 인사들이 많았고,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시문의 찬작도 자연히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정현덕과 함께 『조선근대명가시초』에 이름을 올린 강위와 개항기에 동래 부사로 근무하기도 했던 종두법의 전파자 지석영(池錫永)[1855∼1935], 「대동속악부(大東續樂府)」를 지은 박치복[1824∼1894]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강위는 갑신정변 직전에 일본에 가면서 「부산해승선(釜山海乘船)」을 지어 감회를 읊은 바 있고, 박치복은 「망해탄(望海歎)」 7수에 신문물의 유입을 바라보는 자신의 착잡한 심사를 담기도 했다.

개항기에는 부산 지역 출신 문인들에 의한 시문의 창작도 이전에 비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37년에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東萊郡誌)』 「제영(題詠)」조에 ‘증(增)’의 형식으로 덧붙인 제영은 개항기 이후 부산 지역 문단의 새로운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박필채(朴苾彩)[1841∼?]와 문성준(文聲駿)[1858∼1930], 양재일(梁在日)[1863∼?], 이광욱(李光昱)[1860∼?] 등의 작품이 비교적 많이 보인다. ‘증’의 제영시에 정현덕의 「태평원(太平園)」이라는 시에 화운 형식으로 지은 시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정현덕이 중심이 되어 ‘태평원시단’(太平園詩壇)이라고 할 만큼의 활발한 시회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박필채는 『추호유고(秋湖遺稿)』, 문성준은 『경암사고(耕巖私稿)』, 양재일은 『회원집(晦園集)』, 이광욱『지전집(芝田集)』을 각각 남겼으며, 특히 박필채는 15편의 개화 가사를 짓기도 했다. 양재일 역시 동명학교(東鳴學校)의 건립에 즈음하여 「보국단체가(保國團體歌)」와 「진보가(進步歌)」와 같은 개화 가사를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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