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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211
한자 李學逵
영어음역 Yi Hakgyu
이칭/별칭 낙하생(洛下生),낙하(洛下),성수(惺叟),춘성당(春星堂),인수옥(因樹屋),포화옥(匏花屋),추수근재(秋樹根齋),각시재(卻是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인
성별
본관 평창
출생 시기/일시 1770년연표보기 -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9년 - 「무이구곡도가」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00년 - 『삼서』 저술
활동 시기/일시 1801년 4월 - 능주에 유배됨
활동 시기/일시 1801년 10월 - 김해로 옮겨짐
활동 시기/일시 1803년 - 「시은료기」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08년 - 「고정기사시」, 「영남 악부」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09년 - 「상동초가」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11년 - 「초량 왜관사」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19년 - 「금관기속시」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21년 - 「해동 악부」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23년 - 「삼계재기」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24년 - 해배
몰년 시기/일시 1831년연표보기 - 사망
출생지 한성 황화리 - 서울특별시
거주|이주지 한성 반송반 - 서울특별시
외가|처가 한성 황화리 - 서울특별시
외가|처가 충청도 진천현 - 충청북도 진천군
유배|이배지 능주 - 전라남도 화순군
유배|이배지 김해 - 경상남도 김해시

[정의]

황사영(黃嗣永) 백서 사건(帛書事件)으로 김해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부산에 대한 시문학을 남긴 문인.

[가계]

본관은 평창(平昌). 익평공파이다. 자는 성수(醒叟), 호는 낙하생(洛下生) 또는 낙하(洛下). 아버지는 이응훈(李應薰)이고, 어머니는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의 딸이다. 외삼촌은 이가환(李家煥)이고, 고종사촌은 황사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 교인인 이승훈(李承薰)이 구촌숙(九寸叔)이다. 부인은 나주 정씨(羅州丁氏)이다. 부인의 할아버지는 정약용(丁若鏞)의 10촌으로, 진천 현감을 지냈다.

[활동 사항]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외가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외할아버지 이용휴에게 글을 배웠다. 약관의 나이에 글재주로 이름을 떨쳐 정조(正祖)의 부름을 받아 『규장전운(奎章全韻)』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왕명에 의하여 원자궁(元子宮)에 내릴 책을 교수하여 바치고, 「화성 경리 시말(華城經理始末)」을 번역하는 한편 「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를 지어 올렸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천주교를 믿는다는 의심을 사서 친척인 이승훈(李承薰) 등과 함께 잡혀갔다. 조사 결과 천주교와 무관함이 밝혀졌으나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 그해 10월 고종사촌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국문을 받고 김해로 옮겨졌다.

이학규는 김해에서 약 24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첫 작품은 1803년(순조 3) 지은 「시은료기(市隱寮記)」로, 동래부에 대대로 살아온 변진위(邊振緯)의 시은료에 대한 기록이다. 「시은료기」 외에 「기증 변생시은료(寄贈邊生市隱寮)」라는 시도 있어 1803년경에 이미 동래 지역 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변진위가 동래의 학소대 밑에 마련한 서실을 위해 「취오기(翠隖記)」를 짓기도 했다. 이학규의 작품에는 부산에 관련된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1808년(순조 8) 지은 「고정기사시(苽亭紀事詩)」에는 절영마(絶影馬)에 대한 구절이, 같은 해 지은 「영남 악부(嶺南樂府)」에는 절영마와 정과정(鄭瓜亭) 관련 구절이 있다. 1809년(순조 9) 지은 「상동초가(上東樵歌)」에는 명지(鳴旨)에 대한 구절이, 같은 해 지은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에는 왜관(倭館)과 명지에 대한 구절이 나온다.

이학규는 1810년(순조 10) 통신사 일원이 되어 일본으로 가는 동자(童子) 김철준(金哲俊)을 위해 「송동자 김철준 배신사입일본(送童子金哲俊陪信使入日本)」과 연작시 「부산 방선사칠장 추증김철준(釜山放船詞七章 追贈金哲俊)」을 지었다. 1811년(순조 11)에는 총 20수로 된 칠언 절구 연작시인 「초량 왜관사(草梁倭館詞)」를 지었다. 이 시에는 19세기 초반 부산 지역 및 초량 왜관의 풍속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다수 들어 있다. 원앙귀(鴛鴦鬼), 미구(彌龜), 처척(凄慽) 등의 시어가 그것이다. 이학규는 자주(自註)를 통해 ‘원앙귀’는 왜인들이 아가씨[女娘]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고, ‘미구’는 어린애[兒子], ‘처척’은 꽃[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였다. 「초량 왜관사」에는 또 근강주(近江州), 대판(大坂), 비파호(琵琶湖), 부사봉(富士峰) 같은 일본의 지명도 나온다. 이학규초량 왜관을 통해 일본 문화를 접하고, 인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학규가 교유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문인은 윤사혁(尹師赫)이다. 윤사혁은 무과로 급제하여 동지추부사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김재한(金載漢)의 사위이다. 이학규의 시문집인 『낙하생 전집(洛下生全集)』에는 윤사혁에게 지어 준 시문 몇 개와 서찰이 실려 있는데, 모두 1813년(순조 13) 이후에 쓴 것들이다. 1813년 「증윤사혁 서계용선대격(贈尹師赫書契用扇對格)」, 1814년 「아류화윤사혁(啞榴和尹師赫)」과 「음주회윤사혁(飮酒懷尹師赫)」, 1815년 「즉사위배체견민겸 회윤사혁(卽事爲俳體遣悶兼懷尹師赫)」, 1820년(순조 20) 「증윤사혁(贈尹師赫)」과 짧은 서한 1편 등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해인 1823년(순조 23) 동래 노사복(盧思復)의 재실 삼계재(三戒齋)에 대한 기문인 「삼계재기(三戒齋記)」를 짓기도 하였다. 같은 해 쓰시마[對馬]에 사는 남가산인(南柯山人)이라는 사람이 예주(藝州)의 독로원주인(篤老園主人)에게 시를 보내자 독로원주인이 그것에 차운한 시 두 편을 이학규에게 보내어 화운을 청했다. 동래 지역의 인사가 일본의 다른 지역 문인끼리 창화한 시를 보내어 화운을 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동래 및 왜관을 통해 한일 간에 문학적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학규는 아들의 노력으로 1824년(순조 24) 유배에서 풀려났다.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그해 가을 다시 부산을 찾아 「초량(草梁)」, 「초량 기김종복부지(艸梁期金宗福不至)」, 「정묘(鄭墓)」, 「온천(溫泉)」, 「영가대(永嘉臺)」, 「만공 기공비(萬公紀功碑)」, 「최장군 묘(崔將軍廟)」 등을 지었다. 이 가운데 조선 후기 한일 교류의 상징이었던 영가대에 대해 읊은 「영가대」는 4편으로 이루어진 칠언 절구 연작시이다. 말년에 충주 인근으로 옮겨 살았다.

[학문과 저술]

이학규는 외할아버지 이용휴, 외삼촌 이가환이 남인 출신의 성호(星湖) 계열이고, 정약용과도 먼 인척이어서 자연스럽게 실학(實學) 및 천주교를 접하였다. 일찍이 정조의 명으로 지은 「무이구곡도가」와 부산과 관련된 시문 외에 다수의 책과 글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풍물에 관한 고증기인 『동사 일지(東事日知)』, 인삼의 성질과 재배법, 수확, 저장, 효능 등을 소개한 『삼서(蔘書)』, 조석(潮汐)의 원리와 현상에 대해 쓴 「조석설(潮汐說)」, 월식에 대해 글인 「월식설(月食說)」, 화폐와 경제생활의 상관관계를 논한 「전론(錢論)」,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포함하여 성운(聲韻)에 대한 견해를 밝힌 「성운설(聲韻說)」 등이 있다.

부산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명물유해(名物類解)』는 이학규가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 『명물고(名物考)』를 바탕으로 노덕규(盧德奎)가 증보한 책으로, 이학규의 박물지적 학문 경향을 보여 준다. 서문만 있고 본책은 전해지지 않는 『식기보(食忌譜)』는 식생활과 관련된 사항을 실증적으로 접근한 저술인 것으로 여겨진다. 문집으로 『낙하생전집』이 있다. 이것은 일본 천리대학교(天理大學校)와 동양문고(東洋文庫), 서울대학교 가람문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강원도 횡성 이학규의 종형가(從兄家) 후손 집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을 합쳐 한국한문학연구회에서 영인한 것으로, 일부 시문이 중복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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