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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072
한자 金禹鼎
영어음역 Gim Ujeong
이칭/별칭 해수(海叟)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129번길 98-23[온천동 166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양흥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인
성별
본관 광주(廣州)
출생 시기/일시 1551년 8월 13일연표보기 -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30년 8월 -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옴
출생지 동래부 산저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거주|이주지 동래부 산저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묘소|단소 묘소 -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 129번길 98-23[온천동 1667]지도보기
사당|배향지 향경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쇠미로 129번길 98-23[온천동 1667]지도보기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의 문인.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해수(海叟).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 김국평(金國平)이고 임진왜란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인 판관(判官) 김기(金琦)는 그의 사촌 동생이다.

[활동 사항]

김우정(金禹鼎)은 1551년 동래부의 대표적인 양반 문중인 광주 김씨(廣州金氏) 가문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곳은 동래부 산저리(山底里)[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산저 교차로 부근]이다. 1937년에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東萊郡誌)』 하편에는 원본을 찾을 수 없는 「동래 향안(東萊鄕案)」이 수록되어 있다. 1598년(선조 31)에 작성된 향안에는 5명만 등재되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김우정이므로 동래 지역에서 명망이 있었던 인물로 추측된다. 김우정의 이력 중에 특이한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피로인(被虜人)이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간양록(看羊錄)』을 쓴 강항(姜沆)[1567~1618]이 붙잡혀 교토에 갔을 때, 김우정을 만난 이야기가 전한다. 강항김우정하동의 정창세와 강천추, 진주의 강사준(姜士俊), 이산(尼山)의 송정수 등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쌀과 은화를 모아 통역할 자를 구하고, 귀국(歸國)에 필요한 배를 구했다. 또 다른 피로인인 정희득(鄭希得)[1575~1640]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적은 그의 『(월봉)해상록(海上錄)』에서 전라 좌병영의 우후(虞侯) 이엽(李燁)이 일본에서 도망치다가 붙잡히자 자결한 것에 대해 김우정이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동래 지역의 후학과 후손들이 김우정의 글을 모아 1852년에 『해수 선생 문집(海叟先生文集)』을 만들었다는 점, 조선 후기부터 개항기까지 동래 향교의 주요 문건을 묶어 놓은 『동래 향교 고왕록(東萊鄕校考往錄)』 중에 「본부 사림 정재협 등 재목상서(本府士林鄭載恊等齋沐上書)」에 “이국(異國)[일본]에 머물면서 오직 독서를 일삼고, 수은(睡隱) 등 여러 사람과 고국으로 돌아오자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평범한 사람으로 자처하지 않고 책 속의 성현과 더불어 상대하였으며, 학문의 박식함과 행실의 아름다움이 일시의 추앙을 받았으며 온 고을의 선부로(先父老)들이 모두 옷을 걷고 문하에 들어갔으니[하략]” 라고 한 점을 살펴보면, 김우정은 동래 지역에서 오랫동안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길러낸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래 향교 고왕록』 중에 「동래 유생 문홍량 등 근재배상서(東萊儒生文弘亮等謹再拜上書)」에는 김우정의 나이 겨우 15세에 명종이 승하하자 졸곡(卒哭) 때까지 소식(蔬食)을 했고, 일본에 끌려가서 7~8년을 살다가 돌아와서는 전쟁 때 죽은 부모와 동기를 생각하며 초상(初喪) 때와 같이 곡을 하고 삼년상을 치렀다거나, 선조와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국상 때에도 졸곡의 예를 다했다고 하여 충과 효를 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630년 8월에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향경재(鄕敬齋) 옆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우정은 동래 지역에서 학자로서 스승으로서 살면서 충과 효를 실천한 까닭에, 그에 대한 상훈 사업이나 추모 사업이 계속되었다. 문홍량을 대표로 하는 동래 유생 15명은 연명(連名)으로 김우정에게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는 단자를 동래 부사에게 올렸고, 1633년 당시 동래 부사인 이홍망(李弘望)은 적극 검토하여 시행하도록 조치하였다. 다음해인 1634년 1월에는 동래 유생 17명이 경상도 관찰사에게 글을 지어 올려서 충과 효를 다한 김우정에게 포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761년 1월 동래 유생 송광적(宋光迪) 등 60명은 그동안 동래 지역의 유생들이 여러 번 경상 감영에 글을 올려 김우정에 대한 포상을 요청했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회신만을 받았을 뿐 실제로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동래 부사 홍명한(洪名漢)에게 다시 글을 올렸다. 이렇게 동래 지역에서 김우정은 일본에서 보여준 절의, 친상(親喪)과 국상(國喪)을 치를 때의 예 등으로 충효의 표상으로 기억되었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는 김우정을 모신 향경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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