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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021
한자 朝鮮前期-文學
영어의미역 Literature of the Early Joseon Dynasty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장소 조선 전기의 문학 - 부산광역시 일대

[정의]

조선 전기에 부산 지역을 대상으로 하거나 부산 지역에서 만들어진 한시 또는 산문의 문학 작품.

[개설]

조선 전기에는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鄭敍)와 같은 작가도 없고, 부산 지역 출신이 지은 작품으로서 잘 알려진 작품도 없다. 그나마 어무적(魚無迹)[생몰년 미상]과 정유길(鄭惟吉)[1515∼1588] 정도가 부산 출신 문인으로서 한국 문학사에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동래 부사나 통신사들이 지은 제영이 압도적으로 많은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의 경우에는 인근 지역의 수령이나 경상도 관찰사들이 지은 작품이 많다. 그 외에는 대체로 유람 삼아 부산에 들렀다가 해운대동래 온천에 대한 제영(題詠) 시문을 짓게 된 예들이다. 이밖에 부탁을 받고 부산 지역의 누정이나 관사(官舍)에 대한 제영 시문을 지은 예도 있다.

고려조의 정서가 지은 「정과정곡」과 그 배경이 되는 정과정(鄭瓜亭)은 조선 전기에 들어서도 여러 시인들의 작품 주제나 소재로 활용되었다. 인빈헌(寅賓軒)과 소하정(蘇蝦亭) 역시 고려조에 이어 조선 전기에도 여러 시인들에 의해 제영의 대상이 되었다. 명승고적으로서는 해운대동래 온천이 고려조에 이어 조선 전기에도 문인들이 즐겨 찾아 제영 시문을 남기는 대상이 되었다. 세종 연간에 창건된 정원루(靖遠樓) 역시 주된 제영 대상이었다.

[지역 출신 문인의 문학]

어무적과 정유길은 부산 지역 출신으로 조선 전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문인이다. 어무적가덕도를 포함하는 웅천현 출신이므로 부산 지역 출신으로 분류된다. 안방준(安邦俊)[1573~1654]와 유계(兪棨)[1607~1664]가 주고받은 편지에 어무적의 문집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어무적의 문집이 전해졌으나 현재에는 문집의 소재를 알 수가 없다.

부산과 관련해서는 『동래부지(東萊府誌)』 제영잡저(題詠雜著)의 ‘해운대’조에는 어무적이 지었다는 7언 율시 한시 한 수가 실려 전한다. 1589년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황윤길(黃允吉)[1536~?]이 일본 종의지(宗義智)의 말을 빌어 “선조(先朝) 때 일본에 봉명(奉命)한 사신이 으레 당시 문사(文辭)에 능한 선비를 대동하여 어무적과 조신 등이 왕래하였다.”고 하였다. 어무적은 일본에 가는 통신사가 그를 대동할 정도로 문명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의 ‘해운대’는 아마도 이때 지어졌을 듯하다.

정유길의 문집 『임당유고(林塘遺稿)』에 실려 있는 「송홍시가출안영남(送洪時可出按嶺南)」이라는 시에는 ‘동래는 내 고향[萊山是故鄕]’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미루어 생각해 보면 정유길은 부산 지역 출신의 문인이 틀림없다. 정유길은 1543년에는 선위사(宣慰使)로, 그리고 1568년에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정유길이 지은 「해운대」, 「몰운대」, 「천성(天城)」, 「안골진(安骨鎭)」, 「두모포(豆毛浦)」 등의 부산 지역 제영시는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근 지역 수령 또는 경상도 관찰사에 의한 제영 시문]

조선 전기에는 동래의 현령 또는 부사로서 부산 지역의 명승이나 누정을 대상으로 제영 시문을 남긴 예는 임진왜란 직전에 부임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 외에는 거의 없다. 이는 1604년에 도임한 홍준(洪遵)[1557~1616] 이후로 문신이 부사로 임명되는 것이 보편적인 일로 굳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주로 무신으로 보임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 대신 인근 지역 수령 또는 경상도 관찰사가 부산 지역의 명승을 찾아 감흥을 읊은 경우가 많다.

고경명은 1590년에 동래에 도임했는데, 해운대를 시제(詩題)로 하는 4수의 시와 부산관(釜山館)과 동래 읍성을 내용으로 하는 2수의 시를 남겼다. 그리고 인근 지역 수령을 지낸 문인으로서는 함양 군수를 지낸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온정(溫井)’과 ‘정원루’를, 합천 군수를 지낸 유호인(兪好仁)[1445~1494]과 함양 군수를 지낸 조위(曺偉)[1454~1503], 양산 군수를 지낸 문경동(文敬仝)[1457~1521] 등이 ‘해운대’를 읊었다. 특히 문경동의 경우, 유호인의 ‘해운대’에 차운한 시를 포함하여 해운대를 대상으로 한 6수의 시를 남겼다.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성현(成俔)[1439~1504]은 정원루동래 온천, 해운대, 두모포 등에 대한 제영시를 남겼다. 성현은 30운으로 된 ‘온천’에 대한 제영시를 짓고는 동래 부사와 함양 군수에게 화운시를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의 동래 부사였던 조희(曺禧)[1490~1564]가 화운시를 지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밖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 가운데 김극성(金克成)[1474~1540]은 2수로 된 ‘해운대’를,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최자징의 시에 차운한 시를 포함하여 정과정을 소재로 한 시 2수를 지었다. 1580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홍성민(洪聖民)[1536~1580]은 기장 동헌과 가덕도, 천성, 다대포, 해운대, 두모포, 황화대, 몰운대 등에 대한 많은 제영 시문을 남겼다.

[기타 문인 학사에 의한 제영]

부산 지역을 관할했던 동래가 ‘동국의 봉래’이라는 학설이 있을 정도로, 부산 지역은 절경이 많은 신선경으로 일컬어졌다. 자연히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문인 학사들이 부산을 찾아 승경과 고적을 상찬하며 시문을 남겼다. 최항(崔恒)[1409~1474]과 신숙주(申叔舟)[1417~1475], 서거정(徐居正)[1420~1488],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성현, 남효온(南孝溫)[1454~1492], 조위(曺偉)[1454~1503], 어무적, 정사룡(鄭士龍)[1491~1570], 주세붕(周世鵬)[1494~1554], 정유길, 황준량(黃俊良)[1517~1563], 고경명 등이 그러하다.

「정과정곡」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진 정과정은 조선 전기에도 많은 시인 묵객의 시적 소재가 되었다. 이직(李稷)[1362~1431]과 김시습(金時習)[1435~1493], 양희지(楊熙止)[1439~1504], 남효온, 김안국, 정사룡, 고경명 등이 정과정을 시제(詩題)로 삼거나 시적 소재로 삼았다. 김안국은 최자징(崔子澄)의 시에 차운하면서 “정과정 한 곡조 누가 함께 부르는지[一曲瓜亭誰共唱]”라고 읊으면서 “최군은 취하면 문득 정과정곡을 불렀는데, 그 음조가 맑고 웅장하고 강개하였다.”고 주를 달았다. 「정과정곡」이 조선 중기까지 널리 불리었고, 그로 해서 정과정과 그에 얽힌 사연이 시인 묵객의 시심을 격동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부산의 승경 가운데 조선 전기의 문인 학사들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역시 해운대이다. 최항을 비롯하여 서거정, 성현, 유호인, 남효온, 조위, 김극성, 김안국, 어무적, 정사룡, 정유길, 황준량, 고경명, 홍성민 등이 해운대에 대한 제영 시문을 남겼다. 이 가운데 남효온의 「유해운대서(遊海雲臺序)」는 해운대의 빼어난 경관을 잘 묘사한 대표적인 기문(記文)이다. 특히 문경동은 유독 해운대에 대한 제영만을 남겼는데, 유호인의 「해운대」에 차운한 작품을 포함하여 4제 6수의 시가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이밖에 황준량해운대와 관련하여 3제 4수를, 임란 직전에 동래 부사를 지낸 고경명해운대를 대상으로 한 4편의 제영시를 남겼다.

다대포 인근에 위치한 몰운대다대포진이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면서 그 절승도 더불어 주목받았다. 황준량이 박충원(朴忠元)[1507~1581]의 시에 차운하여 물운대를 시제로 한 2수의 시를 지은 후 구봉령(具鳳齡)[1526~1586]과 정유길, 홍성민 등이 몰운대를 대상으로 제영시를 지었다. 특히 홍성민이 지은 「차다대포판상운(次多大浦板上韻)」 5수는 실제로는 몰운대를 내용으로 하는 시인데, 홍성민은 이와는 별도로 「영몰운대운(詠沒雲臺韻)」을 짓기도 하였다.

동래 온천정원루 역시 주된 제영의 대상이었다. 김종직과 성현, 정사룡 등은 여러 편의 ‘온정’ 관련 제영시를 남겼다. 김종직은 3제 6수를, 정사룡은 4제 6수를 동래 온천을 시제로 삼아 시를 지었다. 정사룡이 지은 동래 온천 관련 시 중에는 30운으로 된 장편의 5언 고시도 있으며, 정사룡은 이 시를 동래 부사와 함양 군수에게 보이면서 화운을 청하였다. 이들에 앞서 신숙주가 남긴 「동래읍성성문루기(東萊邑城城門樓記)」는 정원루에 대한 것이며, 김종직과 성현 역시 정원루 제영시를 지었다.

이밖에 최항이 동래 객사에 대하여, 그리고 유홍(兪泓)[1524~1594]이 동래 동헌에 대하여, 고경명이 부산관에 대하여, 홍성민이 기장 동헌에 대하여 제영한 것 역시 살펴볼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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