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4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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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演劇 |
영어의미역 | Drama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문홍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희곡을 무대에 연출하여 관객에게 보이는 종합 예술의 흐름.
[개설]
연극은 무대라는 공간 위에서 연기자와 연출자·무대 스태프 등의 창조적인 작업의 결과로 나타나는 종합 예술이다. 근대 이전 부산 지역 연극은 적어도 1935년까지 공연된 「동래 야류」[동래 들놀음], 「수영 야류」[「수영 들놀음」]과 판소리를 개량한 창극단의 공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전통 연희의 공연은 당시 어려운 사회 여건 속에서 궁핍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무대 역시도 지금의 상설 무대가 아닌 임시 무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근대]
일제 강점기에 부산 지역은 식민지 거점 도시로 개발되어 식민지 문화의 매개 지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전통 연희의 공연보다는 상대적으로 일본 및 서구 연극의 공연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1907년 4월 극장업을 주 업종으로 하는 부산연극합명회사가 설립되면서 부산 지역 일본 거류민을 관객 대중으로 하여 일본 전통 예능 및 대중 통속극, 신파극 공연이 증가되었다. 그로 인하여 부산 지역은 일본 전통 예능 및 대중 통속극, 신파극 등 공연의 매개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부산 지역이 독자적, 자체적인 연극 양식과 공연을 가지지 못했다는 단서이다. 부산은 일제 강점기 아래서 도시화 과정과 도시 사회상의 모순이 가장 심화된 지역으로서 노동·언론·교육 운동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 운동을 통하여 문화 운동의 발생 여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독자적이고 주도적인 문화 예술 운동이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부산은 일제 수탈의 근거지였고, 일제 자본이 모든 사회 문화적 조건을 결정하고 있어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산 지역에 연극 전용 극장을 건립할 수 없었으며, 아울러 일제가 행한 연극 검열, 연극 운동에 대한 정책적 탄압 및 그 봉쇄 전략에 의하여 근대극 및 근대극 운동의 자생적인 성립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3년 경상남도 지주층 출신인 김정원(金正元)과 양산 출신 엄주태(嚴柱泰) 등이 제공한 민족 자본으로 부산 최초의 근대극 운동체인 백우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에 백우회가 해산되고, 1945년 해방까지 부산 지역에서 자생적인 근대극 운동체에 관한 실증적인 기록은 전무하다. 백우회가 해산되자 엄주태는 백우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대예술연구회의 재기를 위하여 경제적 도움을 주고, 제2회 시연회를 1923년 부산 지역 국제관에서 개최하였다.
이와 같은 전문 연극단의 공연은 부산 지역 근대극의 출발점이 된다. 부산 지역에서 공연된 연극 작품들은 신파극 계열과 근대극 계열들로 양분할 수 있다. 신파극 계열에는 고한승(高漢承)[1902~1950]의 「장구한 밤」, 윤백남(尹白南)[1888~1954]의 「기연」과 「운명」, 이기세(李基世)[1888~1945]의 「희망의 눈물」, 이수창(李壽昌)의 「신생의 서광」 등이 있다. 근대극 계열에는 이규송(李奎宋)의 「선구자의 보수」, 조대호(趙大鎬)의 「무한자본」, 조명희(趙明熙)[1894~1938]의 「김영일의 사」, 조춘광(趙春光)의 「개성에 눈뜬 뒤」와 「4인 남매」, 홍난파(洪蘭坡)의 「최후의 악수」 등이 있다. 그리고 번역극에는 「부활」[톨스토이], 「승자와 패자」[골스워디], 「앵화원」[체홉], 「억무정」[위고], 「오로라」[쇼], 「옥문」[그레고리], 「찬란한 문」[덴세니] 등이 있다.
이러한 공연 작품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부산 지역 근대극이 그 당시 사회적인 문제들, 예컨대 가부장 가족 제도로부터 여성 해방과 신여성의 자아 각성, 개인주의, 기성 윤리와 사회 인습 및 종교의 전도, 민중의 실제적인 삶의 드러냄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동시대 조선 연극의 중간 매개지로서 부산 지역의 근대극은 일본 유학생 중심의 학생극 운동이 전 조선 순회공연을 출발하는 것에서도 형성되었다. 부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근대극 공연은 1921년 7월 8일 동우회 순회 극단의 「김영일의 사」[조명희], 「최후의 악수」[홍난파], 「찬란한 문」 등이다. 이어서 1921년 7월 29일과 30일 양일간 고학생갈돕회의 「기연」[윤백남], 「빈곤자의 무리」[작자 미상], 「운명」[윤백남], 「희망의 눈물」[이기세], 1922년 7월 5일 동경고학생갈돕회의 「선구자의 보수」[이규송], 「신생의 서광」[이수창], 1923년 7월 6일 동경형설회의 「개성에 눈뜬 뒤」[조춘광], 「4인 남매」[고한승], 1923년 7월 29일~31일 양산·부산 지역과 동래에서 교남학우회 하기순회연극단의 「무한자본」[조대호], 「극중극」, 「빈한하지만」, 「소녀 가극」, 1922년 8월 2일과 3일 부산·김해 지역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 연예단의 「기연」[윤백남], 「희망의 눈물」[이기세], 1924년 9월 3일과 4일, 6일 부산 지역 동래·김해에서 고학당학우회 순회 극단의 공연이 있었다.
[현대]
근대극과 그 공연 이후 부산 지역 현대극은 학생극, 연극 축제, 연극 학계와 전문 예술가의 성장, 연극 공연장의 확산, 연극 교육 제도의 확산 등에 의하여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부산 지역 현대 연극계 최초의 전문 극단은 1946년 김정한(金廷漢)[1908~1996]이 창립한 ‘희망좌’이다. 부산 지역 현대극이 지역성과 독자성을 담보로 출발한 연대는 6·25 전쟁의 종전 직후인 1950년대 후반이며, 그 시기에 만들어진 극단은 ‘청문극회’[대표 이시우]와 ‘예술소극장’이다. 이 극단들은 학생극의 주도 세력들에 의하여 창립된 것으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문 극단들은 대체로 학생극 주도 세력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1954년에는 동아대학교 교수 조향(趙郷)[1917~1984]을 주축으로 한 예술소극장이 부산 연극의 맥을 이었다. 진정한 부산 연극은 1963년 2월에 부산연극협회가 출범[초대 지부장 한형석]하면서 부산 연극의 힘이 결집되었다. 그러다가 1969년에 김영송을 주축으로 한 ‘소극장 69’가 출범하면서 부산 연극이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1963년 부산직할시 승격부터 1973년 부산 시민 회관 대극장·소극장이 개관되면서 중구 중앙동에 위치한 옛 부산일보사 4층의 예식장을 연극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부산 연극의 현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963년에 창립한 극단 전위무대, 1973년에 교사 극단 한새벌, 1974년에 극단 현장, 그리고 1978년에 극단 레퍼토리 시스템이 창단하여 활동하면서 부산 시민 회관 공연장을 중심으로 부산 연극이 발전되어 나갔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여러 극단들이 우후죽순 창단되면서 부산 연극은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여, 현재 부산연극협회 소속 극단만 24개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수영 로터리부터 경성대학교 지역에 이르기까지 부산 지역에 소극장만 해도 30여 곳에 이르게 되었다.
부산 연극은 1998년에 부산시립극단이 창단되고, 또한 2004년부터는 부산 국제 연극제가 출범하면서 명실상부한 부산 연극의 도약이 이루어졌다. 1983년부터 시작된 전국 연극제에서 부산 연극은 1987년의 제5회 전국 연극제, 1999년 제 17회 전국 연극제, 2002년 제20회 전국 연극제, 그리고 2013년 제31회 전국 연극제에서 최우수 작품상[대통령상]을 수상하여 부산 연극의 저력을 전국에 과시하였다. 그리고 1987년부터는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부산 청소년 연극제를 개설하여 운영함으로써 연극의 저변 확대를 꾀하고, 2008년부터는 전국 창작 희곡 공모전을 시행하여 좋은 희곡을 발굴하고, 2011년부터는 마루 연극 페스티벌, 2008년부터는 부산 시민 연극제 등을 개설 운영함으로써 부산 연극의 르네상스를 이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