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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의 세거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17
한자 南區-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in Nam-g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 세거지 부산광역시 남구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부산광역시 남구 지역은 삼한 시대 변한에 속하였으며, 삼국 시대에는 대증현에 속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에 동래군에 속하였다가 고려 시대에 양주군에 편입되었고, 조선 전기 동래진에 소속되었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남촌면 상단(上端)[숭정리·동부리·서부리·북문외리·남문외리·축산리·감포리·칠포리]과 하단(下端)[포이포리·남천리·대연리·석포리·분포리·용당리·감만리·우암리]에 속하였으며,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1904]에서는 남상면[구락동·북외동·남외동·서일동·서이동·서삼동·동일동·동이동·동삼동·감포동·덕민동·평민동·호암동·남천동]과 남하면[대연동·용소동·지곡동·당곡동·용호동·용당동·감만동]으로 나와 있다.

1910년 부산부 남면[남상면 대부분과 남하면 일부 포함]과 용주면[남하면 일부]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남구에 속한 지역이 동래부 용주면[대연리남천리 일대]과 서면[용당리·감만리·우암리·문현리 일대], 남면[현 수영구 일대]으로 분할되었다. 1936년[부산부출장소 설치 직전의 행정 구역]에는 서면[문현동·대연동·우암동·용호동·용당동·감만동]과 남면[남수동·광안동·남천동·망미동·민락동]에 속하였다. 1936년 문현리·대연리·용당리·용호리·우암리·감만리가 속한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42년 남천동·수영동·광안동·민락동 등이 관할로 포함되었다. 1973년 부산진구 대연출장소가 시 직할 출장소로 승격하였으며, 부산진구 문현동을 합하여 남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수영구가 분할되면서 현재 문현동, 대연동, 우암동, 감만동, 용당동, 용호동을 관할하고 있다.

[형성과 변천]

남구의 지형은 전형적인 배산임수다. 북으로는 황령산이, 나머지 면은 바다와 인접한다. 이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들어와서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에 발행된 『조선의 성(姓)』 동래군 조에 동래 지역에 존재하던 45개 지역의 집성촌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부산 지역 인구 분포 및 세거 성씨에 대해 알 수 있다. 다만 기재 기준이 15가구 이상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용호동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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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전후로 대연동 못골에는 죽산 박씨(竹山朴氏)가 600여 년 전부터 세거지를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또한 석포에는 동래 정씨(東萊鄭氏), 용소에는 금산 김씨(錦山金氏), 당곡에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달성 서씨(達成徐氏)가 세거지를 이루었다. 1945년경 못골에는 죽산 박씨(竹山朴氏) 50가구, 여산 송씨(礪山宋氏) 10여 가구, 김해 김씨(金海金氏) 10여 가구, 밀양 박씨(密陽朴氏) 10여 가구, 기타 20여 가구 등 모두 100여 가구가 살았다.

석포에는 동래 정씨가 오랫동안 살았다. 1530년(중종 25) 동래성 수문장 정복덕(鄭福德)의 아들인 정춘세(鄭春世)가 동래에서 수영을 거쳐 석포로 들어오고 이후 용소로 이주하였다. 그 후 이곳에는 경주 김씨(慶州金氏)와 유씨 등이 해방 전까지 50여 가구가 살았다. 용소에는 약 500여 년 전부터 경주 이씨(慶州李氏) 20여 가구, 380년 전에 창녕 영산에서 이주해 온 금산 김씨 30여 가구가 살았으며, 그밖에 김해 김씨 10여 가구, 남평 문씨 10여 가구, 김녕 김씨(金寧金氏)와 기타 성씨 약 50여 가구가 해방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당곡에는 30여 년 전에 남평 문씨, 경주 최씨(慶州崔氏) 등이 이주해 왔으며, 해방 당시에는 남평 문씨 15가구, 경주 최씨 10여 가구, 달성 서씨 10여 가구 등 모두 40여 가구가 살았다.

1964년 부산직할시 토지 구획 정리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연동은 부산시의 변두리 농촌 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였던 가구 수를 보면 못골에 50여 가구, 석포에 30여 가구, 당곡에 20여 가구, 용수에 30여 가구 정도였다. 이들 마을은 자연 마을로 대부분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으며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약간 있었다.

남구의 동남단에 위치한 용호동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래부지』에 보면 용호동은 조선 시대에 분개[盆浦]라고 하였다. 용호동은 조선 경종 원년(1721)부터 지금의 용호 2동인 구터 자리에 처음으로 몇몇 집이 들어섰는데, 주민들은 울창한 숲을 헤치고 농토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해초를 채집하면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점차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의 마을은 크게 네 곳으로 구분된다. 해방 당시 이곳에는 김해 김씨, 김녕 김씨, 파평 윤씨(坡平尹氏), 개성 왕씨(開城王氏), 담양 전씨(潭陽田氏), 밀양 박씨 약 10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용당동남구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해 김씨, 김녕 김씨, 경주 최씨, 인동 장씨(仁同張氏), 나주 임씨(羅州林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함안 조씨(咸安趙氏) 등이 세거지를 이루었다. 주로 고기잡이를 하거나 약간의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하였다.

감만동남구의 남쪽 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때 군사 용지였다.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감만포에 설치되었다가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옮겼으며, 임진왜란 직전 동래의 해운포로 옮겼다. 그후 1635년(인조 13) 다시 감만포로 옮겼다. 이 기록에 따르면 조선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해방 당시 감만동에는 300여 가구가 거주하였다. 그중에서 오래 살았던 것은 김녕 김씨 50가구, 김해 김씨 20여 가구, 밀양 박씨 17가구, 창녕 성씨(昌寧成氏) 13가구, 남원 양씨(南原梁氏) 12가구, 인동 장씨 10가구, 그 외 순흥 안씨(順興安氏)와 담양 전씨 등이 살았다.

우암동남구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이후 한일 양국의 표류민의 지정 접수처였고, 여러 문서에 우암포라는 지명이 자주 언급되고 있어 조선 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본다. 인동 장씨가 대표적인 세거 성씨다. 이후 광복 후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와 6·25 전쟁 때 이북에서 온 피난민이 대다수 정착하여 인구가 증가하였다. 남천동남구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약 400여 년 전이었다고 한다. 문현동남구에서 다서 번째로 큰 동으로 남구의 서단에 위치한다. 8·15 해방과 6·25 전쟁으로 피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현황]

2013년 현재 파악된 남구 지역 세거 성씨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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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의 세거지 현황은 도시 개발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용호동의 경우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형성된 세거지 형태가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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