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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구의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16
한자 東萊區-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in Dongrae-g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래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현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 세거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정의]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동래구의 서쪽은 금정산맥이 북동에서 남서로 뻗어 있고 동쪽은 장산의 서쪽 말단부에 위치한다. 수영강의 지류인 온천천이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르며, 하천 연변의 침식 분지에 시가지가 발달하여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으로 열린 분지 지형을 이룬다.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는 당시 동래부 행정 구역이 7개 면[읍내면·동면·남촌면·동평면·사천면·서면·북면], 82리, 19동 체제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중 읍내면을 중심으로 동면서면 일부가 현재의 동래구에 해당한다. 현재 동래구에는 사직동, 온천동, 복천동, 낙민동, 명륜동, 명장동, 수안동, 안락동, 칠산동의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으로 보는 동래 지역 성씨]

동래구는 부산 지역 행정의 중심 지역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래 지역의 성씨를 살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경상도 지리지(慶尙道地理誌)』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다. 『경상도 지리지』 동래현조에는 토성(土姓)으로 정씨(鄭氏), 송씨(宋氏), 옥씨(玉氏), 정씨(丁氏), 조씨(曺氏)를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래현조에도 토성으로 위의 다섯 개 성씨가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외에 왕씨(王氏)·박씨(朴氏)·이씨(李氏)·김씨(金氏)가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선 전기에는 정씨, 송씨, 옥씨, 정씨, 조씨, 왕씨, 박씨, 이씨, 김씨 정도가 동래 지역에 세거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동래 지역 세거 성씨와 관련하여 『동래부지(東萊府誌)』[1740년]에는 삼성대가 보인다. 삼성대는 성씨 3개가 세거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안씨·송씨·옥씨를 말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동래읍지」 인물조에 옥씨와 관련하여 옥종손(玉從孫)을, 송씨는 송백(宋伯)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송씨·옥씨·정씨·조씨 4성 가운데 지방 향리에 계속 머물러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지 못하였다. 안씨와 조씨의 행적에 대해서도 자료가 없어 찾을 수 없다.

19세기 말 동래 지역의 호구 상태를 보여 주는 자료는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이다. 이 자료는 1904년(고종 41) 10월 탁지부 사세국에서 편찬한 동래군 12개 면의 가호 대장이다. 이 자료에는 동래군의 84개 성씨와 4,870호의 가호 수가 기록되어 있어 다양한 성씨의 출연과 가호 수를 알 수 있지만, 본관별로 구분하지 않아 거주하는 사람들의 분포를 자세히 알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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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의 내용은 현재의 동래구뿐만 아니라 당시 동래군 내에 있던 전 지역을 대상으로 통계를 냈기 때문에 동래구만의 실정은 알 수 없다. 또한 1930년 일제는 조선의 식민지 수탈을 강행하기 위하여 국세 조사를 단행하였는데, 이 때 동래 지역의 성씨 중 김씨(金氏), 정씨(鄭氏), 최씨(崔氏), 유씨(柳氏), 권씨(權氏), 조씨(趙氏), 송씨(宋氏), 조씨(曺氏), 임씨(林氏), 우씨(禹氏), 정씨(丁氏), 곽씨(郭氏), 방씨(方氏), 왕씨(王氏), 유씨(劉氏), 옥씨(玉氏), 차씨(車氏), 화씨(和氏) 등 18개 성씨를 조사하였다.

이들 18개 성씨 중에는 『경상도 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다섯 토성인 정씨·송씨·옥씨·정씨·조씨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의 내성인 왕씨·박씨·이씨와 하나의 내성인 김씨가 동래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이들 다섯 토성은 조선 전기 이래 계속 동래에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의 성(姓)』에는 현재 동래의 것으로 해운대구 석대동영양 천씨(潁陽千氏) 24호가 거주한다고만 되어 있다. 이 책의 기재 기준이 15호 이상이기 때문에 아마 그 이하의 숫자로 세거하는 많은 성씨가 탈락되었으리라 본다.

또 1937년에 발행된 『동래군지』 성씨조에는 수관 성씨(受貫姓氏), 세거 성씨(世居姓氏), 우거 성씨(寓居姓氏) 등 3항목으로 구분하여 본관별로 거주하는 성씨를 서술하고 있다. 기록 방식은 입향조와 자손을 함께 서술하였으며, 본관은 같으나 입향조가 다르면 입향조별로 모두 기록하여 이전의 읍지 서술 방식과는 아주 다르게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가구 수나 인구수가 기록되지 않아 아쉽다. 내용은 ˂표2˃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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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 성씨 현황]

이상의 기록에서 동래 지역에서 세거하는 성씨 세거지의 일면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2000년대 동래 지역의 세거 성씨를 보도록 하자. 현재 세거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온천동 광주 김씨(光州金氏)현풍 곽씨(玄風郭氏) 정도다. 그래도 조선 후기의 동래구 세거 성씨로 확인된 것은 이외에도 수안동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추계 추씨(秋溪秋氏)다. 청주 한씨는 1700년대 한지(韓址)가 동래로 들어왔고, 추계 추씨는 17세기 중반 추시강(秋時岡)이 입향하였다. 온천동 달북 마을 광주 김씨는 김우중(金禹鼎)이 임진왜란 이전에 들어와 현재 이곳에 20여 가구가 향경재라는 재실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온천동현풍 곽씨도 1756년(영조 32) 곽시회(郭時檜)가 입향하여 미산재라는 재실을 중심으로 10여 가구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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