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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10
한자 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양흥숙

[정의]

부산 지역에서 특정한 성씨가 모여서 대대로 세거한 지역.

[개설]

세거지는 집성촌, 동족 부락, 동족 촌락과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된다. 집성촌은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란 의미이며, 특정 성씨가 마을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지역성을 형성하는 데 크게 관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특정 성씨가 마을의 이름이 되는 경우도 있다. 동족 부락(同族部落), 동족 촌락 역시 집성촌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마을 구성원이 친족이라는 의미를 더 부각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세거지 역시 집성촌에서 출발하였지만, ‘집성(集姓)’이라는 의미보다 적은 수의 가호라도 세대를 계승하면서 거주해 온 마을, 오래된 거주지라는 공간적 측면을 더 강조한 말이다. 이는 19세기 후반부터 진행된 급격한 도시화, 해방과 귀환 동포, 6·25 전쟁과 피난민, 산업화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전근대 도시 형태를 점차 탈피한 부산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

온 마을이 같은 성을 가진 일가친척 관계의 촌락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부산광역시기장군, 강서구, 금정구 일대에 집성촌으로 알려진 마을이 존속하기는 하지만 다른 성씨를 가진 이주민이 증가하고, 분가·이사·개방 등으로 특정 성씨가 마을 전체를 대표하던 외형은 사라졌다. 중구, 서구, 동구, 부산진구 등에서는 처음부터 집성촌이 없었거나, 있었다고 해도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지역에 이주민, 피란민 등이 거주하면서 그들의 삶터로 일구고 있기 때문에 몇백 년의 세거는 아니더라도 4~5대에 걸쳐 거주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는 부산 지역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며, 이들 역시 부산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므로 집성촌이 아닌 세거지란 의미로 포괄하고자 하였다.

[변천]

조선 시대 동래부는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읍치(邑治)인 동래읍성, 수군 기지인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좌수영성], 부산진성(釜山鎭城), 다대진성(多大鎭城)이다. 이러한 성은 행정,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거주지도 대부분 성 주변 지역에서 발달하였다.

1740년(영조 16) 당시의 행정 구역과 거주지를 보면 동래읍성을 중심으로 한 읍내면[동래구, 금정구], 읍성 동쪽의 동면[동래구, 해운대구, 금정구], 읍성 서남쪽 좌수영성 주변의 남촌면[수영구, 남구], 읍성 남쪽 부산진성 주변의 동평면[부산진구, 동구], 낙동강 위쪽과 아래쪽 마을을 합친 사천면[사상구사하구, 중구], 읍성 서쪽의 서면[동래구, 연제구, 부산진구, 북구], 읍성 북쪽의 북면[현 금정구]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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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래부에 속하지 않았던 기장군강서구를 제외하면, 부산의 주거지는 위 지명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중구, 서구, 영도구는 18세기 중엽 당시에는 사람이 모여 산 큰 마을이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은 근대의 개항과 산업화, 6·25 전쟁, 도시 개발 등으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 존속하던 세거지는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의 성(姓)』[1934]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성』의 「동래군」에는 오늘날 중구, 서구, 동구, 동래구, 연제구, 사하구, 수영구, 영도구, 금정구의 집성촌은 보이지 않는다. 강서구 지역은 「김해군」 편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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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의 세거지는 산업화와 도시 개발 전에는 큰 변화가 없었음을 감안할 때 부산의 세거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동래의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가 사는 곳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동래군지(東萊郡誌)』[1937] 성씨 조에 나타나 있는 세거 성씨와 우거 성씨는 입향조, 주요 자손 등을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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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강서구는 아직 부산광역시에 편입되기 전이므로 강서구의 성씨는 조사되지 않았다. 또한 중구, 서구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확대되면서 형성된 구(區)이므로 전통적으로 세거하는 성씨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부산진구, 동래구, 남구, 해운대구, 금정구, 사상구, 기장군 일대에 아직 세거 성씨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970년대 부산의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면서 세거지는 더욱 감소되었다. 1971년과 1976년 부산의 동족 부락을 조사한 글에는 12개의 부락만 소개되어 있다. 전수 조사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더라도 해당 동의 인구가 증가하는 반면, 동족 부락에 해당하는 가호 수는 동일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12개의 부락 가운데도 3곳은 내부적으로 동족 의식, 혈연 의식이 희박해져서 지역 사회 리더로서의 힘을 읽어 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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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역시 녹산 공단으로 대표되는 산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전통적인 자연 마을은 이주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이렇듯 부산 지역은 광역시로 형성되어 가는 동안 산업화와 근대화의 제일선에 있었기 때문에 행정 구역의 분화 및 편입이 많고, 6·25 전쟁에 이은 도시 개발 등으로 거주지의 변화가 많았다.

[현황]

그렇다면 2014년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중구는 조선 후기에 사람이 사는 큰 마을은 거의 없고, 오늘날 용두산 공원 주변으로 일본인 마을 왜관(倭館)이 있었다. 또한 근대 이후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자리해서 수백 년을 내려오는 전통적인 의미의 세거지는 없다. 그러나 귀환 동포, 6·25 전쟁 피난민 등이 자리 잡았던 중구에는 3대 이상 세거하는 주민이 증가하고 있다.

서구중구와 인접한 대신동, 부용동, 부민동, 아미동은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중구와 세거지 유형이 거의 같다. 동구부산진성이 있었던 지역이므로 오래전부터 세거하던 사람이 많았으나 개항 이후 이주민이 급격히 증가하고, 일본인의 세력 확대 등으로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전통 자연 마을 구조는 사라졌다.

영도구는 조선 시대 이래 목장이 있었기 때문에 목장을 관리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는 극소수의 주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큰 마을은 형성하지 못하였다. 영도구 역시 근대 개항 이후 개발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6·25 전쟁 때 피란민들이 많이 정착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극히 드물지만 100년 이상 세거를 하는 가호가 있다. 부산진구서면 일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세거지가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조사된 바 있는 여러 세거지와 세거 성씨들이, 세거 가호가 줄어들었지만 외형을 유지한 채 지금도 존속하고 있다.

동래구는 조선 시대에는 읍치가 있었던 곳인 만큼 세거 성씨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1976년 조사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수안동온천동에서 특정 성씨 세거지를 확인할 수 있다. 1995년 동래구에서 분구된 연제구거제동에서 몇 개 성씨 세거지만 발견될 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남구개성 왕씨(開城王氏)의 세거지로 유명한 용호동을 포함하여 다수의 세거지를 찾아볼 수 있는 지역이다. 임진왜란 전에 이거한 성씨를 비롯하여 600년 이상 세거하고 있는 특정 성씨들이 남구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살고 있다. 남구 역시 타성 이주민이 증가하고, 세거 성씨들의 분가, 이주가 늘어나 명맥을 유지하는 세거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1995년 남구에서 분구된 수영구는 좌수영성이 있었던 곳이며, 「수영 야류」·「좌수영 어방놀이」의 계승 등으로 전통의 맥을 이어 나가는 문중이 있다. 이들 문중으로 형성된 몇 개의 세거지가 남아 있다.

북구화명동, 구포동, 만덕동이 주된 세거지다. 금정산, 넓은 평야와 강, 계곡을 끼고 있으면서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 문중들이 자리 잡았고, 그 때문에 세거 성씨도 다양하다. 그러나 대규모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세거지 모습이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해운대구는 현재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번화한 해운대의 이면 지역에 세거지가 발달하였다. 여러 기록에서 빠지지 않는 석대동 세거지를 비롯하여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 문화재 제1호인 삼절사를 중심으로 한 반송동, 반여동, 재송동, 송정동 지역에는 여러 성씨 재실이 현존한다. 좌동·중동·우동 지역에도 세거하던 성씨들이 있었으나 1970년 이후 해운대 개발이 급격히 이루어져 세거하는 가호가 크게 줄어들었다.

사하구는 낙동강 하구의 넓은 삼각주를 끼고 있는 지역으로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곳이다. 더욱이 조선 시대 다대진성이 있는 지역이여서 성 주변으로 큰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세거한 마을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이후 입향한 성씨들이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금정구는 조선 시대 동래읍성의 북면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역이 넓고, 『동래군지』에서 보이듯 우거 성씨가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현재 금정구 13개 법정동 중 금성동, 남산동, 청룡동, 노포동, 두구동, 선동, 오륜동, 회동동, 금사동, 서동 등에는 적은 가호지만 세거를 하는 성씨들이 존속하고 있다. 구서동, 장전동, 부곡동 지역에 공공기관 및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세거 주민이 많이 이주한 상태다.

강서구는 일부 지역이 1978년 부산직할시 북구에 편입되고, 1989년 현재의 강서구 지역이 강서출장소에서 구(區)로 승격되었다. 오랜 기간 김해군에 속하여 대도시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부산 지역 가운데 세거 성씨가 가장 많아 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현재 가락동, 녹산동, 강동동, 대저동, 명지동, 가덕도동에 세거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강서구 역시 김해 공항과 부산 신항 개발, 해안가 매립, 대규모 공단 입주 등으로 이주되고 사라지는 마을이 많다.

사상구는 임진왜란 이후에 입향한 성씨가 대부분이며, 1601년 동계(洞契)를 결성했던 기록이 있어 세거지의 특성을 알려 준다. 사상구의 세거지는 일제 강점기 조사, 1970년대 조사 때 빠지지 않고 소개되었다. 학장동, 주례동, 괘법동 등은 현재까지 특정 성씨들의 세거지로 존속되고 있다.

기장군은 1995년 부산광역시에 편입된 곳이다. 동해를 끼고 있지만 장안, 정관, 철마 등 내륙 지역도 넓어 세거지가 현재도 많이 남아 있다. 『조선의 성』의 「동래군」 편에는 45개의 집성촌이 소개되었는데, 이 가운데 집성촌 21개가 기장군에 소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소개된 세거지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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