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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구의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14
한자 影島區-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in Yeondo-gu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영도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경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 세거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정의]

부산광역시 영도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영도의 옛 이름은 절영도로서 일찍이 주변 바다는 청어, 오징어, 멸치 등의 청정 어장이었다. 이러한 자연 조건으로 일찍부터 사람들은 들어와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동삼동 조개더미는 이러한 정황을 가장 잘 반영하는 유적지이다. 또 후삼국 시대부터 이 지역에 국마를 기르는 목마장이 있어서 마정(馬政) 조직이 주둔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왜관 절영진이 설치되며 한일 관계의 외교 또는 군사적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에는 이 지역이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 이후 도항해 온 일본인들이 무리를 지어 세거하여 이들을 위한 유곽(遊廓)도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 아파트 건설 붐이 일면서 영세한 영도 토박이들을 밖으로 내몰고 육지에서 들어온 또 다른 타성바지들이 아파트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현황]

영도에서 세거하여 온 성씨들은 파평 윤씨(坡平尹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김해 김씨(金海金氏), 안동 장씨(安東張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창녕 김씨(昌寧金氏), 안동 권씨(安東權氏) 등이었다. 특이한 것은 1896년(고종 33) 영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김치몽이 통영에서 이거해 와 세거하기도 하였다. 2013년 현재 4대 이상 거주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밀양 박씨 박해철(朴海徹)[1947년생]은 4대조 박기성(朴技成)이 천주교를 믿다가 병인박해[1866년] 때 난을 피해 세거지 다대포를 떠나 동삼동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박규화(朴圭華)[1855~1932]→박진두(朴震斗)[1894~1967]→박근위(朴瑾胃)[1930~2000]→박해철→박홍규(朴洪奎)로 이어져 세거하고 있다. 특히 박진두는 목도공립학교 동삼분교[현 동삼초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지역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파평 윤씨는 윤경수→윤경덕→윤성대로 이어지며 동삼동에서 세거하고 있다. 봉래동의 안동 권씨 권영대(權永大)[1936년생]는 할아버지 권경오가 울산에서 세거지를 옮겨 와 봉래동에 정착하면서 권성실(權成實)→권영대로 이어졌다. 청학동에는 김해 김씨 삼현파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기장군 일광면 용천리의 김해 김씨 문중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절영지』(절영지발간추진위원회, 1983)
  • 인터뷰(영도향토사연구 김이곤, 2013. 9)
  • 인터뷰(봉래동 향토사연구 권영대, 2013. 9)
  • 인터뷰(영도구 동삼동 구룡회장 박해철, 2013. 10)
  • 인터뷰(영도구 동삼동 윤대철, 2013. 9)
  • 인터뷰(영도구 동삼동 김병규, 2013. 10)
  • 인터뷰(영도구 동삼동 박무칠, 2013. 10)
  • 인터뷰(영도구 동삼동 박중권, 2013. 10)
  • 인터뷰(영도향토사연구 안원찬, 2013. 10)
  • 인터뷰(안동 권씨 화수회, 2013. 10)
  • 『부산 지명 총람』1~8(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5~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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