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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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區-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in Jung-gu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경업 |
[정의]
부산광역시 중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원도심인 중구 지역은 1678년(숙종 4)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초지였으나 1678년 이후 1876년(고종 13)까지 초량 왜관이 설치, 운영되면서 부산 안에 있는 일본인 마을로 기능하였다. 1876년 개항으로 이 일대는 일본인 전관 거류 지역으로 조선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은, 일본인의 치외 법권이 적용되는 곳이 되었다. 그런 연유로 우리나라 사람이 입주하여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광복 후여서 성씨 세거지로서의 역사는 매우 짧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에서 몰려 온 피난민은 우선 중구에 터를 잡았다. 이들 피난민들에 의해 영주동과 보수동 등의 산복 도로에 새로운 주거 집단이 생겨났다. 그러나 전쟁 후 환도와 1960년대 이후 도시 환경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산복 도로 거주 도시민을 강제로 철거 이주시켜 거주민이 이동이 많았다. 이런 까닭에 중구 지역에서는 3대가 머물며 사는 세대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특징]
중구 지역의 성씨 세거지 특징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이 지역 중심지는 오랫동안 일본인 주거 전용 마을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전통적인 형태의 세거지는 찾을 수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와 일본인이 떠난 지역에 새로이 세거지가 조성된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근세 세거민들로는 김해 김씨와 밀양 박씨, 밀양 변씨가 대표적이었다.
둘째, 중구는 1950년 6·25 전쟁이 시작된 후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의 거주처가 되어 산복 도로 등에 새로운 생활 거처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무허가 판잣집들이어서 도시화가 진행되며 도시 미관과 환경 개선이란 명분으로 이들을 강제 철거하고 이주시킴으로써 제대로 대를 이어 온 세대를 찾기가 어려웠다.
셋째, 원도심 지역이기 때문에 주거지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허다하여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세거하는 세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최근 중구에서는 토박이 조사라고 하여 3세대가 세거하는 세대를 찾아 50명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린아이까지 헤아려 3대 토박이로 규정한 터라 오래 살면서 터를 지켜 온 세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를 활용하여 조사가 진행 중이다. 넷째, 예로부터 주거지로 활용되던 영주동과 보수동 역시 주거 환경이 열악하였다. 특히 이곳은 1953년의 부산역전 대화재로 주거 이동이 심하였는데, 산동네에 들어선 아파트도 서민 중심이어서 안정적인 거주가 힘들었다.
[현황]
3대가 세거하는 가계를 중구 토박이로 설정하고 이를 조사한 자료에 나타난 세거 성씨는 김해 김씨(金海金氏) 8가구, 밀양 박씨(密陽朴氏) 5가구, 함안 조씨(咸安趙氏) 3가구, 강릉 유씨(江陵劉氏)·안동 권씨(安東權氏)·월성 이씨(月城李氏)·안동 김씨(安東金氏) 각각 2가구이다. 그 외 진양 강씨(晉陽姜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창녕 성씨(昌寧成氏), 영산 신씨(靈山辛氏), 선산 윤씨(善山尹氏), 광주 김씨(光州金氏), 밀양 손씨(密陽孫氏), 수원 백씨(水原白氏), 양천 허씨(陽川許氏), 광산 탁씨(光山卓氏)가 각각 1가구였다.
영주동 강릉 유씨는 집안 대대로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하였다. 통사 유정준(劉庭俊) 이래 유창석→유재업(劉載業)[1929~2011]→유명준(劉明俊)[1961년생]→유동훈(劉東勳)으로 이어져 세거하고 있다. 영주동 밀양 손씨는 손승리(孫勝利)[1944년생]의 아버지 손우생(孫又生)[1903년생]이 일본에서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영주동에서 세거하고 있다. 손승리→손혁(孫赫)→손건희로 이어진다. 광복동 밀양 변씨(密陽卞氏) 변종길(卞鍾吉)[1939년생]은 아버지 변상명(卞相明) 사후 서구 남부민동에서 광복동으로 이거하여 변서욱(卞瑞旭)[1963년생]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