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0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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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甲- |
영어의미역 | Armor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이현주 2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삼국 시대와 고려~조선 시대의 갑옷.
[개설]
갑옷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인체를 보호하기 위해 착장한 방어용 무장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정확하게 언제부터 갑옷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까지 출토된 가장 오래된 철제 갑옷 조각은 기원전 2세기경의 가평 대성리 유적(加平大成里遺蹟)에서 확인되었다. 삼국 시대 이전에는 가죽으로 된 피갑(皮甲), 나무로 된 목갑(木甲)의 존재를 예상할 수는 있으나 남아 있는 예가 없어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갑옷은 크게 판갑(板甲)과 비늘 갑옷[찰갑(札甲)]으로 구분되는데,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는 철제로의 전환이 가장 일찍 일어나 4세기 대 종장 판갑 계통이 크게 유행하였다. 또한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 철제 비늘 갑옷의 제작도 선구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철제 비늘 갑옷은 이후 우리나라 갑옷의 가장 큰 줄기를 이루어 통일 신라~고려~조선 시대에까지 이어진다.
[삼국 시대의 갑옷]
삼국 시대의 갑옷은 판갑과 비늘 갑옷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판갑
판갑의 제작은 종적 설계 원리(縱的設計原理)[세로로 인체의 곡률을 잡아 철판을 좌우로 연결하는 방법]를 사용한 종장 판갑 계통(縱長板甲系統)과 횡적 설계 원리(橫的設計原理)[가로로 인체 곡률을 잡아 상하로 연결시키는 방법]를 이용한 대금식 판갑 계통(帶金式板甲系統)으로 구분되며, 이 둘의 과도기적인 형태로 방형 판갑 계통이 있다.
1) 종장 판갑 계통
종장 판갑 계통은 세로로 긴 철판 7~11매로 구성되었으며, 철판을 가죽으로 엮는 종장판 혁철 판갑(縱長板革綴板甲)과 못으로 고정하는 종장판 정결 판갑(縱長板釘結板甲)으로 구분되는데, 가죽으로 연결하는 방법이 고식(古式)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福泉洞古墳群)[사적 제273호]을 중심으로 한 부산은 4세기 대에 이미 정형화된 철제 판갑이 출현한 지역으로, 한반도에서 자체 제작된 철제 갑옷으로서는 가장 선구적인 사례이다.
특히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에서 출토된 종장판 혁철 판갑은 철판을 가죽으로 엮어 나갔으며, 부채꼴 모양의 목 가리개[頸甲]와 측경 판(側頸板)[옆 목 가리개]을 겸한 장방형 철판, 어깨가 강조된 날개판 등 초기 철제 판갑의 전형적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4세기 중엽~4세기 후엽에는 주로 종장판 정결 판갑을 사용하였는데, 부산 복천동 고분군 57호, 71호, 69호에서는 2령을 매납하기도 하였다.
종장판 정결 판갑은 대체로 철판 7매로 구성되나, 5세기 대가 되면 폭이 좁고 수량이 많아져 11매까지 있게 된다. 철판의 연접은 후동부(後胴部) 중심 판을 기준으로 하여 바깥쪽으로 덧대어 연결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개폐 장치(開閉藏置)가 아예 없거나, 있다면 양쪽 혹은 오른쪽 옆구리에 있으며, 모두 혁대 경첩(革帶蝶番)이다. 또한 뒷길 판의 위쪽에 목 가리개와 측경 판을 제작하여 부착하였는데, 이 점은 5세기 대의 대금식 판갑이 부속 갑을 따로 제작한 것과는 구별된다.
목 가리개가 처음 나타난 시기에는 종장 방형 철판 여러 매를 덧대어 부채꼴 모양으로 만들었으나, 4세기 후반 대 이후에는 점차 간소화하여 장방형 철판 1~2매를 가로로 놓고 연결하여 후동부 위쪽에 부착하였다. 반달 모양의 철판으로 옆 목을 보호하는 측경 판은 후동부에서 어깨를 넘어 가슴 부분에 세워 부착한다. 부산 지역에서 종장 판갑의 출토 사례가 많은 곳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 38호, 42호, 43호, 44호, 46호, 56호, 57호, 69호, 71호, 86호 등이다.
2) 방형 판갑 계통
방형 판갑 계통은 우리나라에서 부산 복천동 고분군 64호와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大成洞古墳群)[사적 제341호] 1호에서 출토된 두 가지 예만 알려져 있다. 방형 판갑은 종장 판갑 계통이 종적인 설계 원리에서 점차 뒷길 판과 앞길 판을 추가하고, 목 가리개 철판도 횡으로 변화하는 등 복부(腹部)만 남기고 모두 횡적인 설계 원리로 전환하는 과도기에서 발생한 판갑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방형 판갑의 철판의 연결 방법이, 한 단으로 만들어 놓고 이들 단과 단을 상하로 연결시키는 횡적인 설계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금식 판갑으로 분류하기에는 하나의 대금이 없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있다. 따라서 종장 판갑과 동 시기에 존재하면서 종장 판갑에서 파생된 유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갑옷의 전체적인 흐름상 중요한 획기가 된다.
3) 대금식 판갑 계통
대금식 판갑 계통에는 철판 모양과 연결 방법 등을 기준으로 삼각판 혁철 판갑(三角板革綴板甲), 삼각판 정결 판갑(三角板釘結板甲), 장방판 혁철 판갑(長方板革綴板甲), 횡장판 정결 판갑(橫長板釘結板甲) 등이 있다. 대금식 판갑은 종장 판갑의 도련판, 앞길 판, 뒷길 판에 적용된 대금(帶金)[틀]의 원리가 발전하여 생겨난 것이다. 횡으로 인체 사이즈를 대금으로 정해 놓고 삼각형, 횡장방형, 장방형 철판을 채워 나가는 원리로, 제작 공정상 대량 생산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대금식 판갑의 출토량은 적으며, 5세기 후반부터 부산과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역에 한정적으로 분포한다. 부산 지역에서 장방판 혁철 판갑은 연산동 고분군(蓮山洞古墳群)[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호] 8호 출토품이 있으며, 전국적으로도 출토 예가 적어 울산 하삼정 고분군과 고흥 안동 고분, 김해 두곡 고분군 정도에서 출토되었다. 삼각판 혁철 판갑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4호 출토품이 있으며, 삼각판 정결 판갑은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전 연산동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8호, 생곡동 가달 고분(生谷洞加達古墳)[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3호] 출토품이 있다. 횡장판 정결 판갑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2호 출토품이 있는데, 이 유물은 금동으로 장식된 못과 경첩을 사용하여 의장용의 갑옷으로 추정된다.
대금식 판갑의 제작지에 대해서는 한일 고고학계에서 아직까지 논란이 종식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에서 제작하여 한반도로 공급하였다는 설과, 4세기 대 종장 판갑의 변화 과정을 통해 대금식 판갑으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설이 있다.
2. 비늘 갑옷
비늘 갑옷은 형태적으로는 일정한 크기의 소찰(小札)[미늘]을 가죽으로 연결하여 만든 갑옷의 총칭이며, 기능적으로는 상하로 유동성이 크게 고려되어 설계되었다. 이러한 비늘 갑옷은 현재까지 전체적인 형태가 복원된 예가 없어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소찰의 형태로 볼 때 변화 과정을 알 수 있다. 성행 시기는 4세기 전엽에 처음 나타나 6세기 대까지 이어지며, 여러 종류의 갑옷이 있으나 가장 기본적인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비늘 갑옷은 소찰을 좌우로 연결하여 전동(前胴)의 중앙에서 여미는 동환식(胴丸式)과 조끼처럼 옆구리에서 여미는 양당식(裲襠式)이 있다. 우리나라 비늘 갑옷의 경우, 허리 부분의 곡률을 살린 요찰(腰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동환식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속 갑으로 목 가리개와 팔뚝 가리개[肱甲], 위 팔뚝 가리개[上膊甲], 치마 갑[裳甲], 허벅지 가리개[大腿甲], 정강이 가리개[脛甲] 등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4세기 대의 비늘 갑옷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38호, 56호, 64호의 예가 있다. 소찰 형태는 길이 7~12㎝, 폭 4~7㎝ 내외로 곡률이 미미하게 있는 방형의 허리 부분 소찰과 이를 중심으로 상원 하방형(上圓下方形)의 소찰을 상체와 하체로 나누어 구성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5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판갑의 부장량은 줄어드는 반면 비늘 갑옷의 부장은 폭증하여 전국적으로 그 예가 60여 개가 넘는다. 종장 판갑이나 대금식 판갑은 주로 한반도 동남부, 나아가 중서부 일부에서 출토되나, 비늘 갑옷은 전국적인 분포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무덤 부장품 외에도 성곽, 주거지 등 다양하다.
소찰의 크기는 이전에 비해 폭이 좁아지는 경향을 띤다. 폭이 약 2.5㎝, 길이가 5~9㎝의 작은 소찰들로, 부산 복천동 고분군 11호 출토품을 기준으로 복원해 본다면 동체부가 6단, 허리 부분인 요찰이 1단, 그 아래 상갑찰이 4단 확인되었다. 부산 지역에서 출토된 5세기 대의 비늘 갑옷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11호, 34호, 35·36호, 47호, 140호, 학소대(鶴巢臺) 1구 3호 등의 출토품이 있으며, 연산동 고분군 8호, 부산 오륜대 고분(釜山五倫臺古墳) 채집품 등이 있다.
[고려·조선 시대의 갑옷]
실물 자료로 알려진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갑옷은 삼국 시대와 비교하여 그다지 많지 않다. 갑옷은 대개 사용된 방호재(防護材)를 기준으로 하였을 때 철갑(鐵甲)과 피갑(皮甲)으로 구분되며, 형태적으로는 두루마기와 같은 포형(袍形)이다. 즉 상·하의가 하나로 되어 있으며, 개폐 방식에 따라 가운데가 열리는 합임(合袵)과 왼쪽으로 여미는 좌임(左袵)이 있다. 옷은 길이가 길어 아랫부분이 허벅지까지 덮이므로 활동성을 위해 옆트임이 되어 있는데, 허리에까지 미치는 경우가 많다. 이들 포형 갑옷은 내부에 소형 편찰(片札)을 부착하거나 일체의 편찰을 대지 않은 두정갑(頭釘甲), 외부에 두정이 노출되어 있고 내부에 가죽 미늘을 부착한 피갑(皮甲)으로 구분되며, 이외에도 쇄자갑(鎖子甲), 경번갑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는 충렬사(忠烈祠)[부산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7호]에 보관·전시되어 있는 조선 시대 갑옷이 3점 있는데, 모두 내부에 편찰이 없는 무편찰 두정갑으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부산 첨사 정발(鄭撥), 다대포 첨사 윤흥신(尹興信)의 것이다. 한편 최근에는 조선 시대 동래읍성(東萊邑城) 해자에서 철제 비늘 갑옷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소찰의 연결 방식이나 출토 상태로 보아 두루마기 내부의 편찰을 고정한 두정갑과는 다른 형식으로 삼국 시대의 철갑 비늘 갑옷과 유사하여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