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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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戰爭 |
영어의미역 | Wars in the Goryeo Dynast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고려 시대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항쟁과 전쟁.
[개설]
고려 시대 부산에서는 내적 요인으로 항쟁이 발생하였고, 외침이 있을 때도 전쟁을 겪었다. 내적 요인에 의한 항쟁은 신라 말 고려 초 고려와 후백제 간의 전쟁, 무신 정권기의 농민 항쟁과 삼별초 항쟁 등이다. 외침에 따른 전쟁으로는 11세기 초 동여진(東女眞) 해적의 침입, 고려와 몽골 전쟁,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정벌,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이다. 항쟁과 전쟁은 부산에서 발생하기도 했고, 외부에서 일어났을 경우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후삼국 및 무인 집권기의 전쟁]
신라 말 고려 초 격동기의 부산[동래현, 동평현, 기장현] 지역은 고려, 후백제, 통일 신라의 각축장이었다. 이 지역을 제일 먼저 장악한 세력은 후백제였다. 신라를 정복하기 위해 동진 정책을 펴던 후백제는 그 길목에 있는 여러 고을을 접수하였는데, 부산 지역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924년(태조 7) 8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동평현 절영도(絶影島)[현 영도]의 명마 한 필을 왕건(王建)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부산이 견훤 휘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산이 후백제 세력권에 들어가는 과정이나 뒷날 고려가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무인 집권기에는 전국에서 농민과 천민이 들고일어났다. 이 시기 부산에서 농민 항쟁이 발생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인근 김해에서 ‘잡족인(雜族人)의 난’이 일어났고, 부산에서 멀지 않은 밀양과 울산을 중심으로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이 항쟁을 주도하여 부산 지역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고려와 몽골 간의 전쟁이 종식될 무렵 발생한 삼별초 항쟁도 부산에 영향을 미쳤다. 가까운 밀양 지역이 삼별초 호응 봉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인근의 합포[현 마산]와 김해가 삼별초의 세력하에 있었다. 1271년(원종 12) 2월 삼별초는 합포를 공략하여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3월 21일에 동래를 침탈하였다. 그해 1월부터 밀양을 중심으로 삼별초 호응 봉기가 일어나 삼별초는 부산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혔다.
[동여진 해적의 침탈]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 오랜 기간 부산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난 흔적은 보이지 않다가 11세기 초반 동여진 해적이 동해안 쪽에 출몰하였다. 동여진 해적은 1011년(현종 2) 8월, 1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쳐들어와 경주를 노략질하였고, 1019년(현종 10) 4월에는 50척의 배로 일본의 쓰시마[對馬], 이키시마[壱岐島], 하카다[博多] 등을 침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동여진 해적의 서일본 침탈은 부산 지역 사회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1021년(현종 12) 동래읍성을 쌓은 것도 동여진 해적의 대비책으로 여겨진다.
[고려·몽골 전쟁과 고려·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정벌]
무인 집권기 농민 항쟁에 이어 몽골이 쳐들어와 고려 전역은 전쟁 상태에 놓였다. 부산은 몽골군의 침략을 받지는 않았으나 멀지 않은 대구, 경주 등이 침탈을 당해 부산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고,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강제 이주시켜 대대적인 인구 이동이 일어남으로써 촌락 사회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의 일본 정벌도 부산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 정벌의 전진 기지가 인근 합포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지역도 군사 동원, 전함 건조, 군량 확보 등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은 고려에 군사적, 재정적으로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일본 정벌의 전진 기지가 들어선 합포와 인근 지역은 조세 및 역역(力役)에서 가혹하게 수탈을 당했다. 지나친 조세와 역역 수취는 토지의 황폐화와 함께 대규모 유랑민을 발생시켜, 지역 사회의 공동화를 불러왔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충정왕[재위 1349~1351] 대에 한층 잦아진 왜구의 침입은 이후 서남해 연안은 물론이고 수도 개경까지 위협함으로써 고려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횟수는 총 529회인데, 이는 1223년(고종 10)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169년간 집계한 것이다. 왜구의 침입이 가장 빈번했던 시기는 14세기 후반으로,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115회, 우왕[재위 1374~1388] 때 378회 등 493회로 전체의 93%에 해당한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이다. 왜구가 경상도에 침입한 횟수는 114회에 이르는데, 공민왕 대와 우왕 대에 집중되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을 때는 200~500척의 배에 수천 명이 건너올 때도 있었다. 왜구는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세곡을 쌓아 둔 조창(漕倉)을 털고, 해상에서 조운선(漕運船)을 공격하여 사람을 죽이고 곡식을 빼앗아 갔다.
고려 말 왜구가 부산 지역에 침입한 횟수는 1379년(우왕 5)까지 동래 7회, 동평 1회, 기장 3회 등 11회에 달한다. 왜구는 1350년(충정왕 2) 11월 18일 동래를 침탈하였고, 1361년(공민왕 10) 8월에는 동래와 울주[현 울산광역시]를 불태우고 조운선을 약탈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뜸하다가 1376년(우왕 2) 말 다시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하였다. 왜구는 그해 11월 오늘날 거제도 지역인 명진현(溟珍縣)을 휩쓴 다음 함안·동래·양주·언양·기장·고성·영선(永善) 지역을 불사르고 노략질하였다. 왜구의 남해안 침탈은 그해 12월까지 계속되어 부산 지역 외에 양주·울주·의창·회원·함안·진해·고성·반성 등이 큰 피해를 입었다.
1377년(우왕 3) 3월에 접어들어 왜구의 노략질은 더욱 심해졌다. 10월 왜구는 40척의 배에 나눠 타고 동래에 들이닥쳤다. 이때도 부산 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379년(우왕 5) 7월에는 울주에 주둔하여 벼와 기장을 베어 양식으로 삼으면서 기장과 언양까지 초토화시켰다. 같은 달 왜구가 동래현에 침입하자, 우인열(禹仁烈)이 군사를 모집하여 왜구와 대적, 7급을 참살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연해 지역은 인명 피해는 물론이고 촌락 파괴, 성곽과 관청의 소실, 토지의 황폐화 등 인적, 물적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왜구 침탈에 대한 대응과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인구 이동 등은 지역 사회의 변화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