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008
한자 金智泰
영어음역 Gim Jitae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29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배석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기업인
성별
본관 김해(金海)
대표경력 제2·3대 국회 의원
출생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7년 -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부산제2상업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동양척식주식회사 근무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54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68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69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70년
활동 시기/일시 활동 시기/일시 - 1972년
몰년 시기/일시 1982년 4월 9일연표보기 -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3년 11월 22일 -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정에서 흉상 제막식 거행
출생지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거주|이주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학교|수학지 부산제2상업학교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15지도보기
활동지 조선견직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지도보기
관련 유적 자명 김지태 선생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4동 644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대표적인 기업인이자 정치인.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1908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를 살아온 토호였고, 재력도 상당해서 할아버지 김채곤(金采坤)은 영남의 대사찰 통도사의 신도회장을 역임할 정도였다.

[활동 사항]

김지태(金智泰)는 1927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를 14회로 졸업하고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에 입사하였다. 1932년 병으로 퇴사하였지만, 그는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장이었던 카사이[笠井]의 주선으로 울산에 있는 2만 평의 농토를 불하받았다. 3년간의 투병 생활 속에서 울산 농장을 경영한 김지태는 이 농장을 바탕으로 1934년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하여 산업 자본가로 변신하였다. 이후 1935년 조선지기주식회사(朝鮮紙器株式會社) 설립, 1943년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朝鮮鑄鐵工業合資會社) 인수 등으로 해방 전 이미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자본가로 성장해 있었다.

해방은 김지태가 지역 자본가의 울타리를 벗어나 전국적인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 계기는 식민 시기 축적된 자본의 기반과 함께 일제 패망으로 남겨진 일본인 소유의 공장들, 이른바 귀속 기업체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방 후 그의 3대 주력 기업 중 조선견직(朝鮮絹織)삼화고무가 귀속 기업체이고, 한국생사(韓國生絲)를 정점으로 한 여러 제사 공장 중에도 동방제사(東邦製絲)와 대한생사(大韓生絲) 등이 귀속 기업체였다.

1970년대 그의 기업은 조선견직과 한국생사, 그리고 삼화고무라는 3개의 회사를 주축으로 한 거대 그룹으로 성장했고, 특히 한국생사와 조선견직을 양 축으로 하는 ‘한국생사그룹’은 실크 산업에서 국내 최강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생산업체가 되었다. 시중의 농담이지만 ‘세계 최대의 제사업자는 중국의 모택동이고, 다음이 일본의 가타쿠라제사[片倉製絲], 그리고 제3위가 김지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지태는 재계에서 실크 재벌로 통하였다.

자본가적 성공을 바탕으로 김지태는 지역의 대변자임을 자임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그 스스로 ‘외도’라 말했던 다양한 사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부산상공회의소 설립 주도, 『산업 신문』[『국제 신문』 전신] 창간, 『부산 일보』 사장, 부산특별시승격기성회 회장, 제2·3대 국회 의원[부산 갑], MBC 부산문화방송 설립, 부산갱생회 설립, 부일(釜日) 영화상 제정, 부일장학회 설립, 부산상업고등학교 장학회 설립 등이 그의 다채로운 사회 활동 이력이다. 특히 그가 1946년부터 추진한 ‘부산의 특별시 승격 운동’은 1963년 부산의 직할시 승격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실크 재벌로 불린 전국구 자본가이자 부산 지역을 대변했던 김지태의 영광 역시 1970년대 말 한국 경제의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1970년대 후반 일본이 자국의 생사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수입을 규제하고, 싼 중국산 생사가 국제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김지태의 주력 사업인 실크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1979년 수출 종합 상사였던 삼화의 유동성 위기는 한국생사그룹 몰락의 결정타가 되었다. 결국 김지태는 1982년 향년 74세로 사망하였다.

말년까지 호적과 주력 기업을 부산에 두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할 만큼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컸던 김지태였지만 1982년 사망 후 부산에서 그의 흔적은 너무도 빨리 사라졌다. 부산을 대표한 향토 기업이기도 했던 주력 기업들은 부산 경제의 몰락을 대변하듯 대부분 사라졌고, 그가 살던 범천2동 가옥이 팔려 아파트가 들어서고, 집 안에 있던 수목들은 부산광역시가 매입하여 가로수로 심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부일 장학회 등 그가 국가에 헌납한 재산으로 만들어진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를 둘러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집안과의 대립 관계, 부산상업고등학교 후배이자 그가 만든 부일 장학회 장학생이었던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과의 인연 등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이다.

[저술 및 작품]

1976년에 『나의 이력서』[한국능률협회, 1976]를 발간하였다.

[상훈과 추모]

석탑 산업 훈장[1968년], 동탑 산업 훈장[1969년], 은탑 산업 훈장[1970년], 동탑 산업 훈장[1975년], 은탑 산업 훈장[1976년]을 받았다. 1977년에 금탑 산업 훈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정에서 김지태 흉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1.21 인명 오기 수정 [상훈과 추모]김기태->김지태
이용자 의견
김** 상훈과 추모 부분에 '2003년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정에서 김기태 흉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 김기태는 김지태로 수정해야 한다.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검토하여 해당 오기를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감사드립니다.
2019.11.20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