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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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際新聞 |
영어의미역 | The Kukje Sinmun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부산광역시 연제구 중앙대로 1217[거제동 76-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은진 |
[정의]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창간 경위]
1946년 10월 폭동 사건과 관련한 필화(筆禍)의 책임으로 『민주 중보(民主衆報)』 편집국장을 사임한 김형두(金炯斗)는 1947년 5월 부산의 『수산 신문(水産新聞)』[발행인 안영선]의 판권을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동아 산업 시보(東亞産業時報)』를 발행하던 이용희와 합작하여 1947년 9월 1일 『산업 신문(産業新聞)』을 창간하였다.
[형태]
대판[39.1×54.5㎝]으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발행된다. 주 발행 면수는 188면이다.
[구성/내용]
지역 기사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정치, 경제, 사회, 국제, 문화, 생활 전반에 관한 이슈와 뉴스를 다룬다. 『국제 신문(國際新聞)』 웹 사이트는 각종 포털 사이트와 연계하여 다양한 분야의 기사를 제공하고 있다.
정치 분야는 청와대·대통령, 국회·정당, 남북한, 지방 정치로 분류된다. 경제 분야는 부동산, 증권·금융·보험, 쇼핑·유통, 기업·창업, 구인 구직, 복권, 해양으로 분류된다. 사회 분야는 사건 사고, 교육, 보건·복지, 환경, 교통, 날씨, 법원으로 분류된다. 국제 분야는 미국, 일본, 중국, 해외 토픽, 중동으로 분류된다. 문화 분야는 미술, 책·문학, 음악·음반·공연, 연예, 영화·방송, 문화재, 종교, 바둑으로 분류된다. 라이프 분야는 건강 정보, 여성 생활, 스타일, 트렌드, 게임, 맛집, 레저 여행으로 분류된다. IT·과학 분야는 환경, 과학, IT·미디어, 중고생으로 분류된다. 주말엔 분야는 커버스토리, 문화생활 장터로 분류된다. 오피니언 분야는 사설, 칼럼, 시론, 도청도설, 데스크 시각, 기자 수첩, 독자 칼럼, 제언으로 분류된다. 스포츠 분야는 야구, 축구, 배구, 농구, 골프로 분류된다.
『국제 신문』 웹 사이트에서는 포토 동영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은 스포츠, 연예, 패션, 행사 현장, 아침의 갤러리[미술계 전시 관련]로 분류하여 제공한다. 동영상은 종합, 근교 산, 뉴스 앤 이슈, 기획 특집으로 분류되어 있다.
『국제 신문』의 대표적 기사로 ‘근교 산 앤 그 너머’가 있다.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비영남권 지역의 산행 코스를 소개하며 2012년 교통편, 주변 정보, 위성 항법 장치[Global Positioning System]를 이용한 위치 정보 기록, 고도표, 지도 등을 제공한다. ‘근교 산 앤 그 너머’ 기사를 정리하여 『국제 신문』 근교 산 출판팀에서 근교 산 시리즈를 발간하였다. 시리즈 단행본으로 『가 볼 만한 근교 산』, 『신 근교 산』, 『신나는 근교 산』, 『야호! 근교 산』, 『원점 회귀 근교 산』, 『내 맘의 근교 산』 등이 있다. 또한 『국제 신문』 근교 산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아이폰용과 안드로이드용으로 제공하고 있다.
[변천과 현황]
『산업 신문』은 타블로이드판[25.4×37.4㎝] 두 면 체제의 경제지로 사옥은 현 부산광역시 동광동 2가 261번지에 있었으며, 인쇄는 『부산 매일 신문』과 『부산 일보』 공장에서 하였다. 1947년 12월 30일에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여 사장 김지태, 부사장 박순조(朴淳祚), 전무 겸 편집국장 김형두, 상무 겸 영업국장 이용희 등의 경영진이 들어섰다. 1948년 2월부터 타블로이드 배대판 지면을 확장하면서 흰색 갱지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주식회사로 개편된 이래 자금난을 겪어 오다가 1949년 3월 1일자로 3, 4회 주식 불입금 500만 원을 전담한 실업가 이연재(李年宰)가 사장에 취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50년 5월 4일부터 김일소 작의 연재만화 「허풍선」을 연재하였으며 뒤이어 5월 16일부터는 김일소의 네 컷 만화 「신판 흥부전」 연재를 시작하여 고정 독자 확보를 위한 상업적 전략을 꾀하였다.
6·25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어 지방지의 지위가 크게 격상하는 정세에서 1950년 8월 19일자로 제호를 『국제 신보』로 변경하고 경제지의 성격에서 벗어나 종합 일간지로 탈바꿈하였다. 1952년 1월 28일에는 사옥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28번지로 이전하였다.
유진오(兪鎭午), 최호진, 김영진, 조동필, 주요한(朱耀翰), 송지영, 이건호, 박상일 등 당시로서는 쟁쟁한 필진들을 논설위원으로 흡수하여 『민주 신보』, 『동아 일보』, 『경향 신문』, 『한국 매일 신문』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5대 일간지로 손꼽히고, 발행 부수는 8만 부를 기록하였다.
한국 신문 최초로 최신의 외국산 통신 수신 장비를 완비하고 1951년 7월 NANA, 중앙통신과 독점 계약 체결, 9월 AFP 통신과 특약, 1952년 5월 영국 로이터통신과 계약을 체결하는 등 외신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하였다. 1957년 창간 10주년을 맞아 김형두가 사장에 선임되었고, 이후 1958년 9월 25일부터 지방지 최초로 조석간제를 단행하였다. 1959년 7월 8일에는 사옥을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2가 26번지에서 영도구 대교동 2가 69번지로 확장 이전하였다.
1959년 7월 27일에 『국제 신보』가 주최한 시민 위안의 밤 공연 행사가 갑작스런 폭우로 67명의 사망자를 내는 대참사로 변하고, 9월 17일의 사라호 태풍으로 용지 창고가 침수되는 등 경영의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4·19 혁명 후에는 중요한 시기에 용지를 구하지 못해 사흘 동안이나 신문 발행이 중단되는 사태를 맞았으나 『한국 일보』 발행인이었던 장기영의 지원과 독자들의 의연금으로 속간하였다.
1960년 3월 부정 선거 반대 시위를 취재하던 기자들이 폭행·연금당하였으며, 1961년 7월에는 필화 사건으로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이병주(李炳注)와 논설위원 두 명의 필진이 구속되었다. 1964년 11일 럭키그룹이 『국제 신보』를 인수한 뒤 경영의 안정을 되찾고 새로운 시도를 전개하였다. 1977년 6월 1일부터 『국제 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1979년 9월 1일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신사옥을 준공하여 이전하였다.
1980년 11월 25일 언론사 통폐합 계획으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9년 2월 1일자로 복간되어 폐간 전의 지령(紙齡)을 이어받아 지령 제10,993호로 16면을 발행하였다. 1990년 5월부터 롯데그룹이 경영에 참여하였다. 1991년 3월 1일부터 주 120면을 발행하였으며, 1992년 1월 1일부터 일 24면을 발행하였다.
1994년 8월 14일 지상 26층, 지하 5층의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76-2번지[현 부산광역시 연제구 중앙대로 1217] 신사옥 국제 문화 센터를 완공하여 이전하였다. 1994년 10월 20일 일 28면을 발행하였고, 1995년 6월 6일 일 32면을 발행하였다. 1996년 7월 1일 신문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하고, 1997년 5월부터 조간으로 전환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99년 9월 1일 창간 52주년을 맞아 롯데그룹에서 분리되면서 독자 경영 체제를 확립하고 제2 창간 선언을 하였다.
2003년 10월 10일부터 주말판 섹션 ‘주말엔’을 발행하였다. 2004년 3월 31일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교육청, 기업, 연구소, 사회단체 등과 함께 부산과학기술한림원을 창립하고 2004년 6월 30일 부산과학기술협의회로 개칭하였다. 2009년 4월 부산길걷기시민모임[걷고 싶은 부산의 전신]과 제휴하였으며 2009년 10월 27일 걷고 싶은 부산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2012년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발족에 참여하였다.
2012년 현재 불입 자본금 125억 원, 총 발행 주식 300만 주로, 언론사 주주와 지분 현황은 능인선원 대표 이정섭이 72.9%, 국제장학재단 11.3%, 국제장학문화재단 11.3%, 법연원 4.5%이다.
[의의와 평가]
부산의 대표적인 일간지로서 균형 잡힌 시각과 내용으로 지역 주민들의 알 권리를 충족하고 뉴 미디어 시대에 맞춰 동영상 서비스와 『국제 신문』만의 콘텐츠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서비스하는 등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의 종합 미디어로 전환을 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