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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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釜山鎭區-世居地 |
영어의미역 | Busanjin-gu Family Line Villagy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있는 성씨 세거지.
[개설]
부산진구 일대는 삼한 시대에 거칠산국이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동래군 동평현에 속하였다가 1021년(현종 12) 양주 동평현이 되었다. 이후 1519년(중종 14) 동래현에 귀속되었다. 1547년(명종 2) 동래현이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914년 동래군 서면에 소속되었다가 1936년에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51년 부산진출장소가 설치되어 독립적인 행정 구역이 되었다. 1979년 양정동, 개금동, 부암동이 29개 동으로 분동되었고, 1998년 행정동이 통합되어 25개 동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지리적으로 백양산과 황령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대부분 지역이 평지이다. 성지곡을 비롯한 당감천과 부전천, 전포천 등의 하천이 발달하여 농경지로서도 적합하여 일찍부터 교통의 요지면서 사람이 살기에 용이한 지역이었다.
[특징]
부신진구 지역에서는 오랫동안 다양한 성씨가 세거를 이루어 살아왔다. 『조선의 성(姓)』에는 초읍동의 밀양 손씨(密陽孫氏) 35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坡平尹氏) 30여 가구, 당감동의 여양 진씨(驪陽陳氏) 20여 가구, 가야동의 달성 서씨(達成徐氏) 22가구, 부전동의 강릉 김씨(江陵金氏) 30여 가구, 부전동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35가구, 전포동의 김녕 김씨(金寧金氏) 30여 가구, 양정동의 청도 김씨(淸道金氏) 26가구, 가야동의 영양 천씨(潁陽千氏) 10여 가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개금동에는 경주 최씨(慶州崔氏), 분성 배씨(盆城裵氏), 은진 송씨(恩津宋氏) 등이 세거하였는데, 옛 안동네에는 은진 송씨 집성촌이 있었다고 한다. 당감동에는 여양 진씨, 김해 김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坡平尹氏), 영월 신씨(寧越辛氏), 나주 정씨(羅州丁氏) 등이 살았는데, 본동에는 좌수영 수사 후손인 신씨 마을이 있었다고 하며, 성안 마을에는 여양 진씨 집성촌도 있었다.
범전동에는 김씨, 이씨, 박씨, 문씨, 정씨 등 여러 성씨가 혼재하여 거주하였으며 부암동에는 양씨(梁氏), 황씨(黃氏), 정씨(鄭氏), 문씨(文氏), 박씨(朴氏) 들이 살았고 부전동에는 강릉 김씨 38가구, 김해 김씨 35가구가 살았다고 하니 상당히 큰 마을이었던 것 같다. 양정동에도 경주 이씨(慶州李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은진 송씨 등이 살았는데 제일 큰 문중이 청도 김씨로 26가구가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60여 가구가 모여 산다. 연지동에는 김씨, 장씨, 양씨, 박씨, 문씨 등이 살았고, 초읍동에는 여러 성씨가 혼합한 중에 원당골에 밀양 손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이들을 ‘초읍 손씨’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대부분 병자호란, 정묘호란, 세조 대의 사육신 사건 맟 유배 등으로 한양을 떠나 경상남도나 동래로 이거하고, 이후 부산진으로 옮겨 세거지를 형성하게 된 경우들이다. 예를 들어 달성 서씨는 입향조가 직무에 대해 고언하였다가 동래로 유배된 후 그 후손이 계속 부산진에 거주한 경우고, 파평 윤씨는 정묘호란 이후, 강릉 김씨는 병자호란 이후 울산 온양에서 이거하였으며, 김녕 김씨는 사육신 사건으로 이거한 후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현황]
부산진구는 1970년대 이후 도시 개발로 세거지가 허물어져 갔다. 특히 이 지역은 부산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개발과 함께 전통적인 모습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랐다. 1971년과 1976년의 세거지 변화를 그리고 있는 「동족 부락-부산시 동족 부락의 변모」[조갑제, 『신동아』 1976년 10월호]에 보면 이 지역의 세거지 변모 형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양정동의 청도 김씨는 1971년 57가구, 1976년 60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또 초읍동의 밀양 손씨는 각각 33가구, 38가구가 있었다.
이들 성씨들이 그때까지 세거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은 광복 이후 신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문중 내의 전통과 잘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밀양 손씨의 손정줄[부전동 삼성병원 건립자]은 개화 바람이 불 때 서당 공부 대신 명륜소학교에 입학하고, 이후 사립동명고등보통학교를 거쳐 32세에 서면 면장이 되었다.
이후 밀양 손씨 외 다른 집안에서도 앞 다투어 손정줄의 행로를 따라갔고,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하면서 세거지를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를 지나 개발 속도가 빨라지면서 세거지를 지키는 가문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가야동의 달성 서씨 70여 가구, 당감동의 파평 윤씨 10여 가구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