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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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潁陽千氏 |
영어의미역 | Yeongyang Chunsi|Yeongyang Chu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연지 |
천암을 시조로 하고, 천찬석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천씨(千氏)의 본관은 영양(潁陽) 단본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영양 외에도 개성·강화·광주 등 9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 영양 천씨의 세거지를 나타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천씨 세보』에 의하면 영양 천씨 시조는 명나라 초의 조신인 천암(千巖)이며, 그의 후손이 영양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나라 말기 무과에 급제,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임진왜란 때 명장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영량사(領糧使) 겸 총독장(總督將)으로 그의 아들 천상(千祥)·천희(千禧)와 함께 우리나라에 건너와 평양·곽산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고, 정유재란 때도 양호(楊鎬)·마귀(麻貴) 등과 함께 다시 나와 직산·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천만리는 명군이 철수할 때 그대로 머물며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천암을 시조로, 천만리를 중시조로, 조상들이 세거했던 영양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선에 귀화한 명군의 후손을 잡아들이라는 명령 때문에 천만리의 4세손 천찬석(千贊鉐)은 17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지내던 중 명나라가 망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석대동[해운대구]으로 피란, 이주하였다.
1934년 조선 총독부에 발행된 『朝鮮の姓』의 동래군조에는 영양 천씨가 석대동에 32호가 거주한다고 했으며,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영양 천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영양 천씨는 2,478가구에 8,035명[남자 4,314명, 여자 3,721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상리 마을에 영양 천씨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또한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2006년 2월에 보관 중인 효행 청원서와 행정 문서 110여 점, 호구 단자 120여 점, 교지류, 「포창완의문(襃彰完議文)」 등 고문서 272점을 부산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중시조 천만리의 기공비로 자성대 공원 정상에 ‘총독장화산군영양천공지비(摠督將花山君潁陽千公之碑)’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