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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대동 영양 천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64
한자 石坮洞潁陽千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Yeongyang Cheon Clan in Seokdae-dong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100여 가구
인구[남/여] 450여 명
세거지 석대동 영양 천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에 있는 영양 천씨 세거지.

[개설]

영양 천씨의 시조인 천암(千巖)이 중국 서촉(西蜀) 종북산(終北山) 천고봉(千古峰) 만인암(萬仞巖)에서 태어났으므로 천(千)을 성씨로 하였다. 천만리(千萬里)의 증조 할아버지 천일하(千一河)가 노(魯)나라 영양 사람이어서 영양을 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국에 영양 천씨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중시조인 천만리이다. 천만리는 1592년(선조 25)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평양까지 빼앗겨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播遷)하자 명나라가 파병한 구원병 장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병영량사 겸 총독장(調兵領糧使兼總督將)’의 직함으로 평양에 왔다. 이후 왜군을 물리친 명나라 군사는 돌아갔으나, 천만리는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임진왜란 1등 공신으로 정2품 자헌대부 봉조하(資憲大夫奉朝賀)를 내리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하였으며, 사패지(賜牌地) 30결을 내려주었다.

[명칭 유래]

석대란 지명은 일찍부터 사용하여 왔으나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다. 대(坮)는 대(臺)의 고(古) 자로 지역 내에 지명처럼 돌로 쌓은 높은 곳이나 이에 준하는 넓은 반석(盤石) 등의 지형과 관련한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길이 없다. 마을 앞으로 석대천[수영천의 상류로 사천이라고 했음]이 흐르는데, 옛날에는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아 주변에 오륜대·동대·죽연대 등의 높은 대가 많았던 것으로 볼 때, 이 일원에도 풍류를 즐길 만한 좋은 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명칭 유래를 짐작하게 한다.

[형성 및 변천]

천만리의 후손은 평양에 안착하였지만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병자호란[1636]을 일으키고 삼전도 굴욕을 안겼던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을 도피시키거나 보호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엄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평양에 살던 영양 천씨 일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 해운대구 석대동에는 17세기 후반 천만리의 4세손 천찬석(千贊鉐)이 입향하였다. 천착석은 경기도 광주 부윤을 지내던 중 명나라가 망하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석대동으로 피란, 이주하였다. 이것이 영양 천씨 선정공 석대동파의 시작이다. 이후 석대동에는 300여 년이 넘게 영양 천씨가 세거하였다.

[자연 환경]

해운대구 석대동 북쪽으로 산지가 발달하여 있으며, 이곳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석대천에 유입한다. 남쪽에서 석대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해운대구 반여동·반송동과의 경계를 이룬다. 산지에서 흐르는 소하천 유역과 석대천 유역에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상리 마을, 하리 마을 등의 자연 마을이 자리 잡았다.

[현황]

2013년 현재 해운대구 석대동에는 천만리의 17세손 등 영양 천씨 100여 가구 4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석대 문중은 조선 후기 5대에 걸쳐 6효(孝)를 배출한 효열가(孝烈家)로 유명하다. 이들 6효에 대해 1918년 ‘공자부성적도 오륜행실중간소(孔子夫聖蹟圖五倫行實重刊所)’에서 『포창 완의문(襃彰完議文)』을 내렸으며, 이것을 근거로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1960년 3월 문중 산에 정려각(旌閭閣)을 건립하였다. 정려각에서는 매년 5월 5일 일가친척과 자제들이 모여 향사(享祀)를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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