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7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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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襃彰完議文 |
영어음역 | Pochang Wanuimun |
영어의미역 | Document for Ordering Establishment of Building and Stone Monument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유영옥 |
[정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의 효자 5명과 효부 1명을 포창하는 완의문.
[개설]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천만리(千萬里)의 4세손 천찬석(千贊鉐)을 입향조(入鄕祖)로 하며, 5대에 걸쳐 6인의 효자·효부를 배출한 효행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오대 육효(五代六孝)는 천찬석의 6세손 천성태(千聖泰)[1725~1789], 천성태의 아들 천세모(千世慕)[1743~1810], 천세모의 아들 천술운(千述運)[1767~1835], 천술운의 아들 천상련(千相璉)[1795~?], 천상련의 아들 천우형(千禹炯)[1843~1886], 천우형의 처(妻)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가난한 생활에도 부모의 의식(衣食)을 지성으로 공양하였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손가락과 허벅지를 베어 구원하는 효행을 바쳤으며, 사후에도 한결같이 3년간 시묘(侍墓)하여 부모의 장례를 극진히 치렀다. 이에 이들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동래부 및 도내(道內)의 사림과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한 상서(上書)나 서목(書目) 등이 책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편찬/간행 경위]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1752년(영조 28)부터 1903년까지 152년 동안 오대 육효의 효행에 정려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역 유림들이 대규모로 상서에 참여하여, 석대 문중의 오대 육효 관련 고문서는 255건이나 남아 있다. 그러나 수없이 반복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는 끝내 정려를 받지 못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균관 공부자성적도오륜행실중간소(孔夫子聖蹟圖五倫行實重刊所)로부터 『포창 완의문(襃彰完議文)』을 발급받았다. 그 후 1960년 『포창 완의문』에 의해 석대 문중은 영양 천씨 정려각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향사(享祀)하고 있다. 영양 천씨 석대 문중은 1919년에 발급된 『포창 완의문』을 소중히 보관해 오다가, 2006년 2월 23일 오대 육효 관련 고문서 전부를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구성/내용]
『포창 완의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영양 천씨 가문 오대 육효의 효행 단자이다. 공부자성적도오륜행실중간소가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간행하여 유도(儒道)를 장려하자, 여러 고을에서 관련 단자를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둘째, 오대 육효의 효도 행적을 차례로 서술했는데, 이 내용이 『포창 완의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셋째, 한 가문에서 오대 육효가 배출된 것은 고금(古今)에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므로, 이 가문을 표창하여 탁월한 효행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완의문의 전문(全文)을 국역하면 다음과 같다.
“본소(本所)에서는 공자의 사당을 건립하고 『오륜행실도』라는 책을 간행하여 성인을 존경하고 선행을 장려할 때 여러 군(郡)의 단자가 계속하여 도착하고 있는 가운데, 자세히 살펴보니 경상남도의 유림들이 올린 진정서에 의하면 동래군 동래면 석대리의 효자 천성태는 자(字)가 일보(一甫)로서 중국의 영양 천씨 판도 승상(版圖丞相) 천암(千巖)의 후예요 충장공(忠壯公) 총독 오군사(摠督五軍師) 천만리의 8대손인 천익휘(千益輝)의 아들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희생시킨 것이 무릇 두 차례에 이르렀고, 내외의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할 적에 호랑이가 와서 보호하였다. 그 아들 천세모의 자는 국중(國仲)인데, 단정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독실한 행실이 있어서 양친의 병환에 두 차례 단지(斷指)하여 회생시켜 수명을 연장하였고, 두 차례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하는 동안 산군(山君)이 와서 보호하였다. 그 손자인 천술운의 자는 성칙(成則)인데, 행실이 독실하여 가정이 가난하였으나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으며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구해 드리고, 상을 당하여 여묘할 적에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고 사나운 호랑이가 항상 호위하였다.
그 증손인 천상련[초명은 일갑(鎰甲)]의 자는 보여(寶汝)인데, 평소부터 타고난 성품으로 선대의 교훈을 이어받아,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품팔이를 하여 맛난 음식을 구해 부모님께 올리며, 여가가 있으면 밤에 짚신을 삼아 부지런히 일하여 의복을 마련해 계절마다 두루 갖추어 드렸으며, 항상 그 모친이 일찍 돌아가심을 한탄하여 부친상에 시묘하고 복을 벗고 나서 3년 복을 더 입었다. 그 현손이 천우형[초명은 공득(恭得)]의 자는 구락(龜洛)인데, 성품이 효성스럽고 어질어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고 모친이 먼저 돌아가심을 항상 끝없는 통한으로 여겼으며, 부친상에 시묘할 때 묘 곁에서 샘이 솟아났으니, 이것은 대대로 전해오는 효자천(孝子泉)이 아니겠는가.
천우형의 처 김해 김씨는 본디 예절 바른 집안의 후손으로 나면서부터 정숙한 바탕이 있었고 자라면서 단정한 품행이 있어서 시집가기 전부터 효성과 화목의 도리에 극진하여 일찍부터 규방의 모범으로 알려졌다. 비녀 꽂고 시집가자 시부모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면서 마침 먼 타향에 품팔이를 나갔는데, 그 고단하고 약한 형편을 넘보고 다른 사람이 선대의 무덤 위에 몰래 묘를 씀에, 즉시 달려가 묘를 파서 관을 드러내며 열손가락이 다 갈라졌다. 스스로 관청에 자수하였으나 그 기색은 얼음장처럼 늠름하였다.
다섯 효자, 한 사람의 효부가 한 가문에서 한꺼번에 나온 것은 옛적에도 드물고 지금 세상에도 드물어서, 군수(郡守)의 포창과 감영(監營)의 제사(題辭)가 책을 이룰 정도가 되었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제도가 막힌지라 아직까지도 드러나지 못한 지경에 있다. 이런 의논이 본소에 파급되었으므로 들어보니 감동되는지라 먼저 인쇄에 부치고 잇달아 비각을 세워 가문을 표창함으로써 여러 대를 전해온 탁월한 효행이 영구히 천추에 전해져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완의문을 만드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포창 완의문』은 부산 지역의 효행 문화를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며, 일제 강점기 오륜(五倫)의 유도(儒道)를 통해 세태를 변화시켜 보려는 유림(儒林)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