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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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千聖泰 |
영어음역 | Cheon Seongtae |
이칭/별칭 | 일보(一甫),상업(尙業)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석대동 31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숙경 |
[정의]
조선 후기 부산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영양(潁陽). 자는 일보(一甫), 초명은 상업(尙業).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장수로 조선에 왔다가 귀화한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천익휘이다.
[활동 사항]
천성태(千聖泰)[1725~1781]는 맛있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부모에게 드렸고, 가난하지만 부모의 상에 맛난 음식이 끊이지 않게 하였으며 철 따라 몸에 맞는 의복을 마련해 입혔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는 대변을 맛보면서 정성스럽게 간호하고, 위급한 상태에 이르면 손가락을 끊어 입에 피를 흘려 넣었다. 천성태가 단지(斷指)의 효행을 한 후에 정말로 그의 어머니는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부모가 죽자 몹시 슬퍼하며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3년씩 시묘를 살았다. 천성태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시묘를 하는 동안 신이한 일들이 생겼다. 밤마다 호랑이가 와서 호위하고, 한 쌍의 쥐가 두려워하지 않고 천성태의 곁에 머물렀다 한다. 동래부 동면 석대리의 영양 천씨(潁陽千氏) 집안의 효행은 천성태를 시작으로 고손자까지 이어졌으며, 5대에 걸쳐 5명의 효자와 1명의 효부가 나왔다.
[묘소]
천성태의 묘는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천성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52년부터 1903년까지 150여 년에 걸쳐 많은 사림(士林)이 자원하여 백여 장이 넘는 상서(上書)와 등장(等狀)을 올려 정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1919년 마침내 정려되어 천씨 문중에 포창완의문이 내려졌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정려는 1960년 3월에야 건립되었다. 정려각은 석산 공사로 잠시 철거되었다가 1988년 중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