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5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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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會 |
영어의미역 | Night School Associ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한말·일제 강점기에 실력 양성 운동·문화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야간이나 농한기를 이용하여 시행된 부산 지역의 사설 학술 강습회.
[개설]
사설 야학의 경우에는 공식 명칭을 사설 학술 강습회라고 하였다. 사설 학술 강습회의 법적 통제는 1913년에 공포된 ‘사설 학술 강습회에 관한 건’에 따라 실시되었다. 이와 같은 사설 학술 강습회는 주로 밤에 실시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강습회 그 자체를 야학으로 통칭하여 왔다. 관립(官立)의 야학도 있었으나 그것은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지방 행정 당국이나 공립 보통학교의 부수 사업으로서 실시된 것이었으며, 주된 야학은 조선인의 주체적인 교육 운동으로 전개된 사설 학술 강습회라 할 수 있다.
야학회는 비정규적인 교육 기관에서 야간에 실시한 근대 교육을 의미한다. 1898년(고종 35)에 근대 교육을 시무책으로 인식한 관리·개신 유학자·개화 자강론자 등에 의해 시작되었다. 사회단체나 실업가·관리·교사·상급 학교 학생 등은 무산 아동, 근로 청소년, 문맹한 성인 등을 대상으로 교육하였다.
교육 내용이나 설립자 성격에 따라 민족 야학과 식민 야학[일명 관제 야학]으로 나뉘는데, 민족 야학은 문맹 퇴치에 중점을 둔 계몽 야학과 독서회와 같은 의식화에 중점을 둔 민중 야학으로 구분된다. 대다수는 계몽 야학이지만 1920년대 이후 계급 의식 고취를 위한 민중 야학이나 일본어 보급과 식민 정책 홍보를 위한 식민 야학도 성행하였다.
야학회는 실력 양성 운동 확산에 따라 야학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맞았다. 계몽 단체 지회·노동 단체와 민회·민역소(民役所)·민단소(民團所)·민의소·농무회 등은 야학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심지어 노동자와 초동(樵童)들이 야학회를 직접 설립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의 급수상야학(汲水商夜學)[일명 물장수야학], 마산의 노동야학, 부산의 명진야학·수면노동야학, 함흥의 보성야학 등이 대표적이었다.
[변천]
1. 구한말 ~1910년대
부산 지역의 야학회는 1907년(순종 1)에 동래 부윤 김교헌(金敎獻)의 아들이 설립한 동래야학이 시초였다. 이어 설립된 부산야학·명정야학·수면노동야학·명진야학교 등은 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문맹 퇴치는 물론 시세 변화를 일깨우는 교육 현장이었다. 부산 지역에 설립된 야학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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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이후 3·1 운동 전후까지 야학회는 크게 변질되었다. 계몽론자들의 부일·친일화와 더불어 민족 운동의 전면적인 퇴조로 일본어 보급을 위한 국어 강습회[소]로 전락하였다. 친일적인 인사·일본인이나 관공서 등이 설립·운영을 주도함으로써 내선일체(內鮮一體)에 입각한 일본어·수신 등을 주요한 교과목으로 삼았다. 학예회·운동회 등에서 일본어 창가나 강독회를 실시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일본어 능통자를 하급 관리로 특채하거나 지방비 일부를 지원하는 등 이러한 분위기도 조장하였다. 당시 설립·운영된 야학회는 대부분 국어 강습회였다.
부산 지역에는 이러한 분위기와 달리 민족 야학이 만들어졌다. 특히 불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한 계몽 운동격의 야학이 설립되었고, 설립 장소가 영도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교육열이 매우 강하였음을 보여 준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교의 재정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학교 조합이 설립되자, 한국인 유지들 역시 한국인 교육을 위하여 기금을 모아 사립 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부산 지역의 국어 강습회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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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통치와 더불어 야학은 분화·발전하는 계기를 맞았다. 합법적인 민족 운동의 영역 확대에 따른 청년 운동·노동 운동·농민 운동·형평 운동 등의 활성화는 이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순회 강연단 활동은 근대 교육에 대한 필요성과 인식을 널리 확산시켰다. 마산의 노동야학은 이를 선전하고자 명절을 맞아 인근 지역에 선전대를 파견하였다. 각지 청년회도 군 단위의 교육회를 조직하는 한편 이와 유사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2. 1920~1930년대
1920~1930년대 사회단체는 문맹 퇴치를 최우선적인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90%에 달하는 문맹자를 방치한 가운데 민족 운동 진전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 전반기 야학 운동의 주도 세력은 기독교와 관련된 단체이거나 청년 단체였다. 1920년대 후반기부터는 노동·언론사·종교계와 신간회·근우회 지회 등에서 주도하였다. 특히 여자 야학은 교회와 청년회의 주요 사업으로 우후죽순처럼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특히 한말 동래 지역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던 야학이 기장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기장 지역에는 3·1 운동 이후 여성 계몽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기장여자청년회가 설립되었다. 기장여자청년회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바로 여성 교육이었다. 1920년대 부산 지역의 야학회 현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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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의식 고취를 위한 민중 야학은 노동 운동·농민 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활성화되었다. 1920년에 부산부두노동조합이 설립된 이래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신간회·근우회 지회 등도 합법·비합법적인 활동의 일환으로 야학을 설립·운영하였다.
교육 과정으로 근로 청소년이나 성인들의 문맹 퇴치를 위한 경우는 초보적인 한자·산술·역사 지리 등과 한글·일반 상식 등이었다. 가정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부인 야학은 수예·위생 등이 추가되는 정도였다. 학령 아동 구제를 위한 야학은 일어·한글·산술·역사 지리·수신·도화·작문 등으로 공립 보통학교 교육 과정과 유사하였다. 특별한 경우에는 다양한 교과목을 편성·운영하였다.
설립·운영 주체는 관리·실업가·교사·언론인·상급 학교 학생 등 명망가·활동가들과 종교 기관이었다. 이들은 청년회를 포함한 각종 단체의 임원이거나 고문이었다. 노동자·농민들은 자신이나 자제들을 위한 야학을 직접 설립·운영하기도 하였다. 반면 일본인 관리·실업가인 경우도 있었다. 교사들은 명예 교사로 자원 봉사자가 대다수였다.
교육 기간은 2주간에서 2~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다. 반면 3~4년으로 공립 보통학교와 유사한 경우도 있었다. 대다수는 1~2년의 속성 과정이었다. 규모는 30~70명 정도가 절대 다수였으며, 200명 이상에 달하는 큰 규모인 야학도 있었다. 대규모인 경우는 교장·학감·부교장·교사·직원 등의 체제로 운영되는 등 제도권 교육 기관과 유사하였다. 교사진은 8명에서 1명까지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대다수는 2~5명이었다. 장소는 강습소·마을 회관·청년 회관·각종 사무실·공립 보통학교 교실 등이었다.
운영비는 유지의 기부금과 동정금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주민이 운영한 야학은 농계(農契)·학계(學契)의 공동 기금과 공동답 수확이나 각자 부담에 의존하였다. 노동 단체·노동조합의 부대 사업인 경우는 월급 중에서 일정액을 공제하였다. 사용 내역은 대부분 전등료와 난방비, 분필비 등이었다. 가극 대회와 학예회, 영사회 등의 개최를 통하여 동정금을 충당한 경우도 많았다. 월사금은 일부에서 받았으나 절대 다수는 무료였다.
기능은 교육적인 측면과 새로운 민중 문화 창출 공간이었다. 학령 아동의 구제를 위한 경우는 초등 교육 과정이 주류였다. 청소년이나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경우는 사회 교육의 일환이었다. 학예회를 비롯한 강연회·토론회·운동회 등은 민중 생활의 변화는 물론 시대 변화에 부응한 민중 문화를 창출하였다. 새로운 인간관계 형성과 더불어 잔존하던 신분제 등 사회의 각 부분에서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문맹 퇴치는 물론 소통에 의해 결집된 유대 관계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 해방 운동을 추진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이러한 야학은 1930년대에 들어 일제의 탄압으로 줄어들다가, 1940년대에 일제가 전시 체제에 돌입함으로써 ‘청년 훈련소’, ‘특별 훈련 양성소’ 등의 강제 교육 기관을 설치하여 야학의 기능을 박탈하였다. 또한 조선어마저 가르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야학은 민족적 성격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이렇듯 일제 강점기의 노동 야학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대항하면서, 교육의 기회 균등을 얻지 못하였던 한국의 노동 대중을 위해서 선진적 지식인이 창도하고 노동 대중이 주체가 된 신문화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민족적인 대중 교육 운동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의의]
부산 지역의 야학회는 1907년에 동래 부윤 김교헌의 아들이 설립한 동래야학이 시초였다. 이어 설립된 부산야학·명정야학·수면노동야학·명진야학교 등은 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문맹 퇴치는 물론 시세 변화를 일깨우는 교육 현장이었다. 특히 3·1 만세 운동 이후 문화 계몽 운동과 대중 운동 확산에 따라 100여 개 이상의 야학회가 운영되었다. 이곳 야학회는 노동 운동·청년 운동과 연계되면서 민족 해방 운동 진전을 매개체로 하여 일익을 담당하였다.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변화는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나아가 시세 변화에 부응한 민중 문화를 창출하는 체험과 생활 공간으로 활용되는 등 공동체적인 삶을 구현하는 생활 현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