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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931
한자 近代敎育
영어의미역 Modern Education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안경식

[정의]

1895년 근대적 학제 도입에서 1945년 광복 이전까지 부산 지역에서 이루어진 근대적 교육.

[개항기 부산의 교육]

1. 배경

부산 지역에서는 1876년(고종 13) 개항과 함께 신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신교육에 대한 열망도 커졌다. 이 시기에 청, 러시아, 일본 등 여러 열강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하고자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는데, 일본이 청과 러시아를 폐퇴시키고 패권을 잡아 동양 제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유교 문화에 정체되어 있던 우리 사회에 서구 문명이 도입되자 개화와 근대화로 지향하는 기운이 싹트게 되었고, 수구파와 개화파의 대립 격화로 전통과 혁신, 추종과 자주의 갈등과 마찰이 심하여 혼란이 야기되었다. 일본의 세력이 극대화되자 민족적 각성으로 저항 운동과 자주 자강 운동이 높아졌으며, 이러한 기운은 민족 교육을 진흥하기 위한 사학(私學)의 발전을 촉진하게 되었다.

개화기 교육은 크게 세 가지 힘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첫째,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민족의 자주 자강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민간인에 의해 사학이 설립되었고, 둘째, 기독교가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교육 사업을 추진하여 근대식 학교 설치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셋째는 구 한국 정부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한 것인데, 이것은 정치 정세의 변동으로 일본의 식민지 교육의 정지 작업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2. 근대적 학교의 설립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895년(고종 32)에 박기종(朴琪淙)사립부산개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부산에 나타난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이다. 1897년(고종 34)에 정부의 인가를 받아 한국공립부산개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07년(순종 1)에는 사립 학교로 전환하여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정부로부터 보조가 중단되어 경영난으로 학교를 학부에 헌납하였고, 정부는 1909년(순종 3)에 사립부산개성일어학교를 공립부산실업학교와 공립부산보통학교로 나누어 개교하였다.

1895년에 부산진일신여학교가 호주장로회 여자선교연합회의 멘지스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이는 당시 부산 지역 유일의 여자 학교였다. 1898년(고종 35)에는 동래 유지 신명록(辛明錄)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육영 단체 동래기영회가 동래성 안에 있던 한문소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초등 과정의 동래부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03년(고종 40)에 한문소학교가 폐교되자 학생들은 개양학교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개양학교는 1904년(고종 41)에 개성학교 교장인 아라나미 헤이지로가 주선하여 생긴 초등 과정의 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동래기영회 회원들이 개양학교의 설립에 반발하여 이에 대항하는 학교로 삼락학교를 1906년(고종 43)에 세웠고, 결국 개양학교삼락학교에 편입되어 해산되었다. 그 뒤 삼락학교동명학교로 개명하여 초등과와 고등과를 개설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신교육의 도입과 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1895년부터 각종 교육령과 규칙을 제정·공포하였으나 미비한 점이 많았고, 실정에 맞지 않는 점도 허다한데다가 1905년(고종 42)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인의 간섭에 의하여 교육령과 각종 규칙을 대폭 개정하게 되었다. 1906년에 보통 교육령과 고등학교령이 공포되었고, 1909년에는 실업 교육령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실정으로 앞서 공립부산실업학교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초등 교육은 1895년에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8세에서 15세까지의 아동을 대상으로 수업 연한을 3년의 심상과와 2~3년의 고등과로 규정하고, 관립·공립·사립으로 구분하였다. 1906년에는 보통 교육령의 공포로 소학교에서 보통학교로 불리게 되었다. 1907년에 부산 지역의 동래부(東萊府)에서 처음으로 공립동래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9년에는 공립부산보통학교와 사립부산진보통학교가 인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1916년에 고등과는 사립 동래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가, 1922년에 공립으로 이관되어 공립 동래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3. 사립학교 설립 운동

당시 부산 지역에서도 민간인에 의한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이 활발하였는데, 1902년(고종 39)에 다대포실용학교가 설립되었고, 1899년(고종 36)에는 부산진(釜山鎭) 지역의 유지들이 운영하던 육영재[육영학교]가 공립부산개성학교 부산진지교(釜山鎭支校)로 지정받았다. 1907년에는 오늘날 구포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구명학교가 구포에서 설립되었다.

1908년(순종 2) 5월에 부산진부인회 후원 학교인 양정숙(養貞塾)이 개설되었으며, 뒤에 부산진보통학교 분교장이 되었다. 같은 해에 영도에서 오늘날 영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옥성학교가 설립되었고, 그해에 사립명정학교범어사(梵魚寺) 금어암에서 개교하였다. 역시 같은 해에 오늘날 사하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양정학교가 설립되었고, 1909년에는 명지에 사립동명학교가 설립되었다. 1895년 소학교령이 공포된 뒤 전국에는 22개의 관립·공립 학교가 세워졌으나 부산과 동래 지역에서는 1907년에 비로소 공립동래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일본인들도 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1867년(고종 4)에 수제(修齊)학교[뒤에 부산공립소학교, 부산공립심상소학교, 부산제1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이름을 바꾸었음]를 세웠는데, 이것이 지금의 남일초등학교이다. 1905년에는 경부선 개통의 영향으로 철도 회사 사원이 증가함에 따라 초량에 초량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뒤에 부산제3공립심상소학교가 되었다. 또 영도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통학하는 것이 위험하다 하여 1908년에 부산심상소학교 분교가 설치되었는데, 1910년(순종 4)에 목도심상소학교로 승격하였고 뒤에 부산제4공립심상소학교가 되었다.

한편 1906년에 부산고등소학교가 대청동에 설립되어 1908년에 심상과를 병치하였다가 1910년에 심상과는 부산제2공립심상소학교가 되었고, 고등과는 부산제5공립심상소학교가 되어 각각 지금의 화랑초등학교, 토성초등학교 자리에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일본인이 그들의 자녀를 위해 세운 중등학교로는 1906년에 설립한 부산공립상업학교와 부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다.

[일제 강점기 부산의 교육]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탈당하고, 일본은 우리나라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대륙 침략의 교두보로서 한국에 그들의 야욕을 성취시키기 위한 식민지 교육을 철저하게 추진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1905년 10월에 대한 통치 방침(對韓統治方針)으로 ‘한국인을 일본에 감화시키는 것을 교육의 주안으로 한다’는 교육 지배 기본 노선을 결정하였다.

1910년 일본 식민지 교육의 기본 노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 칙어의 취지에 따라 교육을 행할 것, 둘째, 한국인에게 반드시 일본어를 가르칠 것, 셋째, 교육 제도는 한국의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출 것 등이다. 이것은 다음의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첫째는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과 민족적 사상적 기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재래의 자주 학교를 철저히 단속하고 파괴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일본의 천황제를 한국 민족의 도덕적인 기본으로 하여 황민화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교육 1단계인 1910년 총독 정치 시작부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날 때까지의 10년간은 총독부가 『조선 교육령』 을 제정 공포하고, 무단 정치의 뒷받침으로 식민지 교육을 강력하게 추진한 시기였다. 이때의 『조선 교육령』 은 뒤에 있는 몇 차례의 개정령과 구별하기 위하여 ‘제1차 조선 교육령’이라고 말하며, 한국인 교육에만 적용시켜 이때부터 한국인에게 차별 정책을 취하고 있다.

『조선 교육령』 은 교육을 대별하여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전문 교육의 3종으로 하고, 보통 교육 기관은 보통학교와 고등 보통학교, 여자 고등 보통학교였으며, 보통학교는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고 지역에 따라 3년으로 단축할 수 있게 하였다.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 여자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3년으로 하였고, 실업 학교는 2~3년의 수업 연한이었으며, 전문학교는 3~4년으로 총 11~12년에 지나지 않았다. 따로 입학 자격과 수업 연한이 일정하지 않은 간이 실업 학교를 두었고, 대학은 두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일본인의 교육 기관은 학교명을 구별하여 소학교와 중학교, 고등 여학교라고 하였으며, 수업 연한을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 전문학교 2~3년, 대학 4년으로 하여 총 교육 연한을 16~17년으로 하였다. 이것은 한국 사회의 시세와 한국인의 민도가 고도의 교육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우리 민족에 대한 모멸이었고, 또한 한국인의 민족 사상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1. 학교 교육

1910년에 국권이 탈취당한 뒤 부산 지역은 종래의 동래부가 부산부(釜山府)로 개칭되었고, 동래부 관할을 행정 구역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전의 부산직할시 시역과 비슷하였다. 이때 부산에는 공립 학교로 공립부산실업학교와 공립부산보통학교, 공립동래보통학교 등 3개 학교가 있었다.

사립 학교로는 사립동래동명학교와 부산진일신여학교, 사립부산진보통학교 외에 다대포실용학교, 구명학교, 명정학교, 영정학교, 동명학교, 옥성학교, 좌천학교, 초량학교 등이 있었다. 당시 공립부산실업학교에는 81명이, 공립부산보통학교에는 203명이, 옥성학교와 초량학교, 좌천학교, 부산진일신학교의 초등부에는 약 400명 정도가 수학하고 있었다.

1911년 4월에 사립부산진보통학교가 공립 학교로 이관되어 사립좌천학교를 흡수 통합하였고, 그해 11월에 교육령 시행과 함께 부산진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때 공립부산보통학교와 공립부산실업학교도 각각 부산공립보통학교, 부산공립실업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1912년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은 5개의 소학교에 2,890명, 2개의 중등학교에 390명이 재학하고 있어 한국인보다 월등히 많은 학생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의 부산 인구는 7만 4,138명으로 한국인이 4만 3,423명, 일본인이 3만 499명, 그 외의 외국인이 215명이었다. 이때 부산부 안의 한국인의 학생 수는 부산·부산진보통학교에 673명, 부산공립실업학교에 143명, 부산진일신여학교에 165명에 그쳤으나, 일본인은 6개 소학교에 4,093명, 사립부산상업야학교 등 5개 중등학교에 1,229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3·1 운동 당시 부산의 학생과 교원이 적극 호응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는데,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의 봉기는 부산·경상남도 지방의 학생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부산공립실업학교와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도 격렬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어 많은 학생이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심지어 부산진, 사립옥성, 사립명정학교의 어린 학생들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교육 정책은 교육의 중심을 공립 보통학교에 두고, 보통학교를 완성 교육 기관으로 삼았으며, 사립 학교와 서당을 공립 보통학교에 흡수하여 민족 사상 말살을 기도하였다. 1919년에는 3면 1교 보통학교 확충 계획을 세워 추진하였으며, 1930년에 들어서서는 1면 1교 정책으로 바꾸었으나 부산 지역에서는 그 실적이 미미하였다. 특히 3·1 운동에 자극을 받아 부산 지역에서도 보통학교 입학자와 상급 학교 진학 희망자가 증가하였으나 학생을 수용할 수가 없어, 1920년부터 부산공립보통학교부산진공립보통학교는 2부제 수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강습과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으나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1926년 기준 부산부 내에는 부산·부산진·목도·부민의 4개 보통학교에 3,868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에 391명과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초등부에 197명이 재학하여 당시의 한국인 학생 수는 총 4,456명이었다. 1926년의 부산 거주 한국인은 6만 4,298명이었고, 일본인은 4만 803명이었다. 일본인 학생 수는 총 7,859명으로 갈수록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1927년에 부산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가 4년제 4학급 규모로 초량에 설립되었는데, 뒤에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지금의 수정여자중학교, 경남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항공립고등여학교는 소위 항고녀(港高女)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31년에는 1면 1교 확충 계획의 영향으로 남부민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4년에는 수정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36년에 서면부산부에 편입되자 성지공립보통학교부산부의 관할에 들어와 공립 보통학교는 7개 학교로 늘어났고, 학생 수는 7,145명으로 증가하였다. 유치원은 4개 원으로 늘어났는데 모두 사립이었고, 중등학교는 부산제2공립상업학교와 부산공립여자보통학교, 그리고 1931년에 설립된 수정동 소재의 사립공생여학교가 있는 정도였다.

일본은 1931년에 만주 사변을, 1937년에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수행을 위하여 당시의 총독이 주동이 되어 대륙 침략의 교두보이자 병참 기지로서의 한국에 3대 교육 방침을 주축으로 전시 교육 체제를 확립하였다. 3대 교육 방침은 국체 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 단련(忍苦鍛鍊)이었다. 이러한 교육 방침의 연장으로 1941년에 모든 소학교를 국민학교(國民學校)로 개칭하고, 학교 체제를 전시 체제에 맞게 개편하는 동시에 『조선 교육령』 을 1943년에 다시 개정하여 군국주의적인 교육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1943년에는 ‘교육에 관한 임시 특별 조치령’을 공포하여 독재 교육 체제를 확립하고, 교육 체계를 군사 목적에 합치하도록 개편하였다. 이에 따라 중학교는 5년제에서 4년제로 단축되었고, 징병 제도와 학교 지원병 제도를 마련하여 한국인 학생들을 일제의 전쟁 도구로서의 병사나 군수 산업 근로자로 양성하여 이용하였다.

1937년에 초량보통학교와 구덕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8년에 남항소학교사하국민학교, 적기국민학교, 수영국민학교, 해운대국민학교가 부산부에 편입되어 국민학교는 18개 학교로 증가하였다. 그 뒤 다대국민학교성북국민학교를 합쳐 광복 당시에는 20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한편 학교 증설을 약속하고 보통학교 확충에 힘썼으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아 간이 학교라는, 초등학교 과정이지만 문맹 퇴치 수준밖에 되지 않는 학교와 학술 강습소라는 간이 교육 기관을 서둘러 세웠는데, 부산 근교에도 금사간이학교와 화명간이학교, 송정간이학교, 두구간이학교, 제도간이학교가 있었다. 부산부에서는 간이 학교보다는 분교 설치에 치중하였는데 남천, 동삼, 적기, 용연 등의 분교가 있었고, 금성동에는 학술 강습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1937년에 대신동에는 일본인 유지들이 설립한 입정상업실수학교가 있었는데, 주간부는 남자를 수용하여 한국인 학생이 많았으며, 야간부는 일본인 여자들이 많았다. 1939년에는 부산초량상업실수학교가 설립되어 한국인 학생만이 교육을 받았으며, 1940년에는 일신여학교가 동래여자중학교로 개명하였고, 1942년에는 부산공립제2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44년에는 부산제2공립공업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부산제2공립공업학교는 전시 교육 체제로 개편한다는 명목 아래 항일 투쟁이 격심하였던 부산제2공립상업학교를 공업계로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재학생이 있었기 때문에 상업계는 그대로 존속하였고, 학교 간판도 그대로 두었다가 광복 후 다시 상업계 학교로 개편하였다. 부산 유일의 고등 교육 기관이었던 관립부산고등수산학교는 1941년에 어로, 제조, 양식의 3과에 9학급 편성으로 개교하였는데, 뒤에 부산수산대학으로 개명하였고, 이것이 오늘날의 국립부경대학이다.

2. 유아 및 유치원 교육

유아 교육이 뚜렷한 이념과 목표 아래 체계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근대부터이다. 서당 등에서 유아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오래전부터였으나, 부산에서 근대적인 유치원 교육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한국 침략의 전초 기지로 삼아 부산에 건너와 자리 잡았던 일본인 거류민들에 의해서였다.

청일 전쟁 후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고 그들의 교육열이 높아 유치원 설립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大谷派本願寺釜山別院) 주지가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897년 3월 3일에 북빈 통신부 가옥을 빌어 유치원사로 하고, 원아 20여 명으로 개원식을 하였다. 이후 1906년에는 원아가 120명이 이르렀는데, 이 유치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1915년에 공립 유치원으로 부산공립유치원이 설립되었다. 서구 토성동에 원사를 건축하여 1915년에 개원식을 가졌다. 초대 원장은 다까바시였으며, 보모 1명과 조수 1명, 원아 25명으로 개원하였다. 이후 1917년에 현 중구 동광동으로 이전하였는데, 당시의 원아 수는 112명이었고 보모도 3명으로 늘었다. 한국인을 위한 부산의 유치원은 1921년 4월에 동구 좌천동에서 개원한 사립 일신유치원이었다.

1922년 2월 16일 총독부령 제11호로 제정, 1924년 8월에 총독부령 제43호로 개정 시행한 ‘유치원 규정’을 통하여 당시 유치원의 교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치원 규정’에 의하면, 유치원은 3세부터 7세까지의 유아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학교 법인 혹은 학교비의 부담 또는 개인의 비용으로 설립할 수 있는데, 학교 법인 혹은 학교비의 부담으로 설립한 것은 공립 유치원, 개인의 비용으로 설립한 것은 사립 유치원이라고 규정하였다.

유치원을 설립할 때에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되며, 유아 수는 120명 이하로, 보모 1인당 유아 수는 40명 이하로 제한하였다. 유아 교육은 유희와 창가, 담화 및 수기(手技)로 하였다. 일제 강점기 유치원 교육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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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4월 1일 당시 부산의 인구는 한국인이 14만 3,605명이었고, 일본인 거류자가 5만 8,007명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인보다 3배에 가까운 숫자였지만 초·중등 교육뿐만 아니라 유치원 교육도 유치원의 수나 취원 비율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후 광복될 때까지 유치원 교육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였다.

3. 사회 교육

사회 교육은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놓친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는 기능과, 사회 개선의 중요 수단으로 고려되는 기능, 그리고 평생 학습의 계속적인 과정으로서의 교육 기능이 있었다. 부산 지역의 사회 교육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을 잘 알 수는 없지만 향약과 동래기영회, 두구동임석마을청년회 등과 같은 청년회, 야학 운동, 기미육성회, 서당 등에서 그러한 것을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기영회는 동래 지방에서 170여 년 전부터 조직되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동래 관아에서 근무하다가 퇴임한 사람들이 지역 사회 개발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동래기영회는 자체 기금을 축적하여 동래에 삼락학교동명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또 동래 지방의 여러 학교를 보조하는 등 육영 사업에 많은 힘을 썼다. 또한 송공단의 제사와 유지 관리 등으로 주민들의 애국정신을 기르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두구동임석마을청년회는 일제 강점기부터 지역 공동체의 상호 부조와 교화 기능적 조직으로 활동하였다. 두구동임석마을청년회의 조직은 회장과 부회장, 총무, 지도를 각각 1명씩 두고, 고문으로 상노인(上老人) 1명과 유지 2명을 두었다. 매월 25일을 정기 총회일로 하였으며, 청년회의 목적은 마을 청소년들의 풍기를 단속하고 미풍을 조성하며, 마을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청년회는 3·1 운동 이후 확산되어 부산에서도 부산진청년회와 초량청년회, 수정청년회, 서부청년회, 영도청년회 등이 결성되어 항일 운동 및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야학은 부산에서도 매우 활성화되었다. 부산 지역의 야학회는 1907년 동래 부윤 김교헌(金敎獻)의 아들이 설립한 동래야학이 시초였다. 이어 설립된 부산야학과 명정야학, 수면노동야학, 명진야학교 등은 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문맹 퇴치는 물론 시세 변화를 일깨우는 교육 현장이었다. 특히 3·1 운동 이후 문화 계몽 운동과 대중 운동 확산에 따라 100여 개 이상의 야학회가 운영되었다. 이곳 야학회는 노동 운동·청년 운동과 연계되면서 민족 해방 운동 진전을 매개체로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부산의 백산상회가 중심이 된 기미육영회도 교육 사업에 많은 성과를 내었다. 기미육영회는 재질이 뛰어난 청소년을 선발하여 해외 유학을 시켜 장차 국권 회복의 재목으로 쓰자는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이러한 취지로 발족한 기미청년회는 김정설과 이병호, 이제만, 전진한, 문시환, 안호상, 이극로, 신성모 등을 외국에 유학생으로 파견하였다.

그 외에 서당이 있었다. 서당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부산에서는 1922년에 19개소에서 585명이 수학하였고, 1929년에는 14개소로 줄어 수학자도 313명에 불과하였다. 1930년에는 서당이 8개소, 수학자가 149명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일제가 서당을 보통학교에 흡수하여 통제하려고 하는 정책과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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