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5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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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理敎 |
영어음역 | Cheolli-gyo |
영어의미역 | Tenrikyo in Japanese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일제 강점기 포교를 위해 부산으로 진출한 일본 교파 신도의 한 교파.
[개설]
천리교는 1882년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로,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진출한 교파 신도 중 교세를 가장 크게 넓혔던 교파이다. 1838년 일본 농촌에 거주하던 평범한 주부 나카야마 미키[中山美伎]가 나라 현[奈良縣] 덴리[天理]에서 천리왕명(天理王命)이라는 신이 강림하면서 시작된 천리교는 나카야마 미키가 주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자 그녀를 중심으로 신도 집단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현세 이익적인 내용으로 출발했으나 기성 종교의 압박에 대항하여 교의를 정비해 자기 몸은 신에게서 빌린 것임을 알고 욕심을 버림으로써 질병 없는 평화 세계에서 살 수 있다고 설법하였다. 조선으로의 포교는 처음에는 교단 본부의 정책적인 차원이 아니라 산하 개별 교회 신자들의 자발적인 포교 노력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조선 포교의 배경과 목적]
천리교의 조선 포교는 1893년 코치현[高知縣] 분교회의 사토미 한지로우[里見治太郞]가 부산에서 3~4년에 걸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천리교 기관지인 『미찌노토모[道の友]』에 따르면, “개정 조약이 크게 진척되고 정청군(征淸軍)은 육지와 바다에서 계속 크게 승리를 거두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일본 국내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계림으로 포교를 시도하여야 한다.”고 하여 청일 전쟁 전후 해외 포교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포교 초기에는 조선에 들어와 생활하고 있던 일본인 이주자들이 그 대상이었으나, 점차 조선인에 대한 포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20년대부터는 교단 본부 차원에서의 해외 포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외국어 학교를 설립해 포교사 양성에 힘쓰는 한편 이에 부속된 도서관 등을 두어 포교 관계 자료도 수집하였다. 그 결과 1930년대 말 조선에서의 천리교 신도는 일본인 약 4만 명에 조선인 약 2만 3,000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다른 교파보다도 특히 조선인 포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활동 사항]
천리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교화(敎化)·전교(傳敎)를 목적으로 종교 활동과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기적으로 대제(大祭)를 개최하고 참배단을 모집하여 나라현의 천리교 본부로 보내는 한편 가족이나 친족, 지인 등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병자를 구제하는 것을 통해 교리를 알리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1929년 6월 부산 지역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천리교는 특히 1930년대 이후 전시 체제 하에서는 후방에서 식민지 종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었다. 1932년에는 만주로 파견된 장병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위문대(慰問袋) 보냈고, 비행기 ‘부산호(釜山號)’를 헌납했으며, 부산 공회당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도 개최하였다. 1938년에는 천리교 부인회 부산 지부에서 장병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모포를 헌납했고, 천리교 일여회(一如會) 부산 지부에서는 총후보국(銃後報國) 강조 주간을 맞이하여 1일 1식 ‘야채 없는 날’을 정해 근검·절약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천리교에서 부산에 설립한 선교소로는 1910년 11월 남빈희평(南濱喜平)의 관리 하에 부평동에서 포교를 개시한 동한선교소(東韓宣敎所)와 1912년 11월 관리자 대봉인삼랑(大峰仁三郞)의 알선으로 대청동에 신축된 부산선교소(釜山宣敎所)를 비롯해 개부선교소(開釜宣敎所), 경부선교소(京釜宣敎所), 궁선선교소(宮鮮宣敎所), 보수선교소(寶水宣敎所), 본상선교소(本尙宣敎所), 부남선교소(釜南宣敎所), 부초선교소(釜草宣敎所), 양부선교소(梁釜宣敎所), 애조선교소(愛朝宣敎所), 절영도선교소(絶影島宣敎所), 조남선교소(朝南宣敎所), 초량선교소(草梁宣敎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