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8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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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宗敎 |
영어의미역 | New Religions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조재호 |
[정의]
부산 지역에서 제도 종교와는 달리 비교적 최근에 형성된 종교.
[개설]
부산은 개항과 6·25 전쟁이라는 두 개의 큰 흐름에 많은 신흥 종교가 탄생하고 발전한 지역이다. 개항은 외래 종교가 들어오는 장소로서, 6·25 전쟁은 피난민이 집결하여 불안한 정국 속에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한 종교 가운데 현재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흥 종교로는 천도교(天道敎)[동학], 대한천리교(大韓天理敎), 통일교(統一敎)[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태극도(太極道), 천부교(天父敎) 등을 들 수 있다.
[천도교]
동학(東學)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창시하였다. 1860년 이후 1863년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1827~1898]이 도통을 이어받고, 1905년 손병희(孫秉熙)[1861~1922]에 의하여 천도교라는 제도화된 종교로 등장한 시기는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변혁의 시대였다. 제국주의 침입이라는 외적 조건과 봉건적 왕조 체제의 모순으로 인하여 야기되던 혼돈과 불안 속에서 온갖 노력과 반동의 물결이 교차하였다. 또한 종교적으로 유교의 부패와 불교의 쇠퇴, 기독교의 전래 등으로 혼돈한 사회의 모순을 일거에 해결하고자 한 것이 동학 농민 운동이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 이후에 동학은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인내천(人乃天)의 동학사상을 계승한 손병희는 이전의 동학이 말하던 천주[한울님]의 개념을 없애고 이를 모두 천[하늘]으로 바꾸었다. 손병희는 최시형의 시천주 사상(侍天主思想)을 더욱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사람이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곧 한울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즉 사람은 이미 하늘에 의해 주어진 본성을 지니고 있는 천인(天人),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사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인간에 대한 철저한 자기 신뢰로 이어지는 바, 그 후에 천도교의 본질을 ‘자기 마음을 스스로 숭배하는’ 소위 자심 자배(自心自拜) 하는 종교라고 규정하였다. 1906년 손병희는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하고, 지방에 교구를 설치하여 교단 조직을 새롭게 함으로써 교세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1910년에는 교세가 약 15만 호에 이르렀다.
부산의 천도교는 1930년 천도교 부산교구의 창설자이자 개척의 주도자인 인암(忍唵) 박찬표(朴瓚杓)가 주도하였다. 박찬표는 장기영, 장기동 형제와 더불어 포덕 운동을 전개하여 천도교 전도실[부산시 동구 영주동 6번지]을 설치하고, 중앙 총본부의 인준을 받아 전교사로 임명 취임하였다. 1930년 7월 지역별로 교인들의 교화의 포덕 활동을 위하여 규정에 따라서 부제를 설정하고 천도교 노동사 부산지사를 조직하였다. 1932년 교호수가 50호를 넘어서자 정규의 지방 교회 조직체인 오늘날의 교구에 해당되는 ‘천도교 부산종리원’으로 승격 인준을 받았다.
그러나 1937년 일제의 종교 탄압과 교인들의 징용 징병으로 교인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해방 전까지는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1946년 성낙헌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김해 지역에 수십 호의 포덕을 내어서 부산시종리원 김해전교실을 설치하였고, 초대 전교사에 성낙헌이 취임하였다. 같은 해에 전교실을 부산시 동구 초량동으로 이전하였다. 1947년에 동래종리원을 창설하고 교구 부설 공민학교를 개교하였으며, 부산시종리원 김해전교실을 종리원으로 승격시켰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교회 활동이 위축되었지만 많은 북한 천도교인들이 모여 이를 수습하고 보호하는 데 협력하였다. 1954년 1월 박찬표의 사망으로 후임 교구장으로 김동률을 선임하였지만, 월남 교인들이 이찬영을 교구장으로 추대하여 별도의 예식을 거행하고 보수동에 임시 교당을 마련하여 분립해 나갔다. 이것이 현재의 천도교 남부교구의 전신이 된다. 이후 교세의 확대와 종교 활동에 참여하고, 1984년 초량동에 있는 교구를 신축하였다. 1992년 교인의 수도를 위하여 원동수도원[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교리]을 개원하였다. 현재 14대 교구장인 김길천이 재직하고 있다.
[대한천리교]
천리교는 1838년(헌종 4) 일본의 나라현 천리시에서 교조 나까야마 미끼[中山美依, 1798~1887]를 신의 현신으로 삼아, 어버이신 천리왕이 직접 이 세상에 하강하여 가르침을 편 종교라고 교단 측은 말하고 있다. 천리교의 교리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 천신을 어버이신으로 믿으며, 어버이신이 우주 만물을 생성 화육하는 섭리와 신의 현신인 어버이님을 통한 천리의 교리를 일일 생활에 실천하여 어버이신의 의사인 양기 세계, 즉 천인 공락(天人共樂)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천리교에서는 매일 조석으로 근행을 올리고 있다. 또 매월 한 차례씩 월차제를 올리고 있으며, 정월에 교조가 은신한 날을 기리는 춘계 대제, 4월에 교조 탄생제, 10월에 입교의 날을 기리는 추계 대제를 올리고 있다. 또 인간 창조의 으뜸인 장소이며, 모든 인간의 고향의 터전[천리교 교회본부가 있으며, 태초에 인간을 잉태한 장소]에서는 매월 26일에 월차제를 올리고 있다.
천리교는 부산이 개항지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 일본인 사도미 다로오가 부산에서 최초로 포교를 시작하였고, 1904년 부산부 보영정(寶永町)에서 ‘신리 천리교 부산포교소’를 설치하였다. 1948년 정식 인가를 받고, 1954년 10월 대한천리교 본원으로 개칭하였다. 1973년 기구 개편으로 부산교구가 발족되자 초대 교구장에 정복근이 선임되었다. 교구 청사는 임시로 동래구 수안동 소재 동래교회를 사용하였다. 1975년에 영도구 동삼동 원남선교회로 교구 사무실을 이전하고, 1983년 4월에 교구 신청사를 부산시 양정 3동에 마련하였다. 이후 1986년에는 내분을 겪게 되어 교구 신청사를 폐쇄하였다. 지금의 교구는 초량동에 있다. 현재 부산,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 교회 1,200여 개소, 약 1,800개 포교소, 신자 수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
[통일교]
부산 지역에서의 통일교[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형성과 발전 과정은 한국에서 통일교가 정착한 것과 궤를 함께 한다. 문선명(文鮮明)[1920~2012]이 6·25 전쟁의 피난으로 1951년 11월 27일 부산에 도착하여 엄덕문의 집에 기거하다가 범냇골 성지를 중심으로 한 범내골 토담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뒤 수정동으로 교회를 옮겨 새로운 발전을 맞이하였다.
수정동교회에서 최초로 전도한 사람은 강현실 전도사이다, 그를 대구·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한 것이 통일 교회사의 최초의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요한 목사가 통일교에 입교하였으며, 그가 제주도에서 전도한 이봉운 장로의 가정이 부산으로 건너옴으로써 통일교회 선교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또한 영도로 교회를 옮겨 사경회[부경회]를 하여 많은 식구[신도를 식구라고 함]들을 입교하였다. 그 당시 부산교회는 이봉운 장로가 맡아 인도하였으며, 그가 서울로 상경한 뒤 1958년도 초대 경상지구장에 이요한 목사가 부임하였다. 1962년 1월까지 시무하다가 경상남도·경상북도로 지구가 분립되어 초대 경상지구장이었던 이요한 목사는 경북지구장으로 전근하였고, 1962년 1월 2대 지구장에 정수원이 부임하였다. 1965년 4대 지구장인 유종영이 있을 때, 동구 초량 1동 구(舊) 교구 본부 건물을 매입하여 그곳으로 교구를 옮겼다.
1970년 6월 문선명 목사가 직접 지었던 옛 토담집 자리 위에 범일전을 건립하였고, 1980년 3월 경상남도와 부산 교구로 각각 분립하였다. 1984년 이명정 교구장 재임 시에 양산군 철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에 성산기도원을 세워 부산교구 식구들의 심령을 키우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88년 현 교구 건물인 범천 빌딩[통일 회관으로 개칭]을 구입하였고, 1989년 9월 24일 통일 회관 7층으로 성전을 옮겼다.
통일교회의 편제는 중앙에 협의회가 있고 각 도에 교구가 있으며, 시·군·구에는 교역이 있고 면·동에는 교회가 있다. 부산교구에는 교구 본부 1개소, 교역 본부 10개소, 교회 3개소 등 도합 14개의 교구·교역·교회 등이 있다. 교회의 명칭은 부산교구, 부산진교역, 동래교역, 북주산교역, 남부산교역, 서부산교역, 해운대교역, 영도교역, 중구교역, 사하교역, 금정교역, 범내골교회, 부암교회, 강서교회 등이다.
[태극도]
태극도의 창시자는 조철제(趙哲濟)이며, 증산도 계통으로 현재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 3동에 본부가 있다. 태극도의 교리는 상제인 증산을 삼계를 주재하는 하느님으로 삼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신다. 또 이 상제는 하느님의 시자, 독생자, 계시 받은 자가 아닌 하느님 그 자체라고 한다. 그리고 인위적이 아닌 조화 정부를 열어 주재하시며, 인간계만이 아니고 신명계까지도 건진다고 한다.
태극도의 창립과 발전 과정은 교조 조철제가 1909년 부친 조용모를 따라서 만주에 가 있을 무렵에 증산교 김혁에게서 증산 교리를 듣고 입산수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조철제는 1917년에 가족과 동지를 데리고 귀국, 충청남도 안면도를 본거지로 삼고 포교를 하였다. 조철제는 우선 증산의 교통 전계(敎統傳系)의 법맥을 잇기 위하여 증산의 매씨(妹氏)를 맞아들이는 한편 개척 사업으로 경제적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1918년 전라북도 봉인읍에 ‘무극도(無極道)[일명 찬인교]’를 세웠으며, 1925년 다시 무극대도교라 하였다. 일제의 해산 명령에 의하여 한때 흩어졌다가 광복 이후 이를 다시 모아서 태극도라는 교명으로 1948년 부산시 보수동에 본부를 두었다가 1955년 감천동으로 이전하였다.
조철제의 사망[1958년] 후에 도전으로 있던 박한경이 무학도통(無學道通)을 주장하며 실권을 잡자 박종화, 이윤성, 김용화 등의 간부들이 박한경에 반대하고 당시 경영하던 기업체[부산 협동상회 미곡상]의 많은 재산을 갖고 탈퇴하고 말았다. 그 후 박한경은 10년 동안 교단을 이끌었으나 거듭되는 내우외환으로 교단 경영이 어려워지자 1968년 본 교단을 해체하고 서울에서 대순진리회를 발족하였다. 이에 이곳 주민 300세대가 박한경을 따라가고, 아울러 각 지역의 신도 태반이 박한경을 따랐다.
당시 본 교단이 앓고 있던 내우외환은 첫째, 박한경이 지나친 절대 권력을 갖고 무학도통을 주장하는 바람에 이에 반발하는 자체 내의 불화가 생겨 탈퇴자가 생기고, 또 이들로 인해 각종 언론, 행정 당국의 간섭과 조사가 심하였다. 특히 4·19, 5·16 등을 거치면서 교단 간부들이 연이어 수감되는 고난을 겪었다. 둘째, 종교촌[태극도 신앙촌]을 이루어 3,000세대가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이곳의 원주민과 이교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한경이 탈퇴하고 조철제의 친아들 조영래가 교단을 이끌면서 10여 년 동안 합리적인 교단을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조영래는 무학도인제 철폐, 합리적인 교단 운영, 샤머니즘 탈피, 모든 의견의 수용 등 현실화를 위하여 여러 조처를 강구했으나, 일부 원로 지도자들의 반발이 있어 1981년부터 도전 자리를 내놓았다.
태극도의 교리는 상제인 증산을 삼계를 주재하는 하느님으로 삼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신다. 또 이 상제는 하느님의 시자, 독생자,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닌 하느님 그 자체라고 한다. 그리고 인위적이 아닌 조화 정부를 열어 주재하시며, 인간계가 아니고 신명계까지도 건진다고 한다. 증산 상제의 계시를 받아 개안한 교조 조철제는 무극(無極)의 진리를 창도하였다. 이 무극은 태극(太極)으로서 우주를 가리키는데, 우주됨의 원시부터 본연의 법칙과 신비스런 묘함을 바로 태극으로 설명한다. 이 태극은 극이 없으므로 태극이라 이르고, 오직 하나일 뿐 둘이 있을 수 없으므로 태극이라 이른다. 또한 이 태극은 지리(至理)의 살리는 바요, 지기(至氣)의 행하는 바요, 지도(至道)의 나오는 바라고 설명하고 있다.
[천부교]
천부교는 한국천부교 전도관부흥협회라고도 한다. 1917년 11월 22일 평안북도 덕천 출생의 박태선(朴泰善)[1917~1990]이 창설하였다. 그는 덕천에서 초등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東京]에서 야간 공업 학교를 마쳤다. 그 후, 소규모의 공장을 경영하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집사로 있으면서 노방 전도와 부흥 집회를 하는 등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1955년 7월 전도관의 모체인 한국예수교 부흥협회를 조직했고, 후에 명칭을 한국예수교 전도관부흥협회로 바꾸었다. 1980년부터는 한국천부교 전도관부흥협회로 개칭하였다. 박태선 자신이 곧 천부(天父)라고 명시하고 있다.
1955년 전국 부흥회를 시작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부산의 부흥회와 관련되는 것이 부산 공설 운동장 집회와 초량 집회이다. 천부교는 1957년부터 교인들의 공동체 신앙촌을 건설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부천 소사와 남양주 덕소, 부산 기장 등에 건설되었다. 기장신앙촌은 1970년 2월에 건설되었는데, 앞의 소사신앙촌과 덕소신앙촌은 없어지고 지금까지 유일한 신앙촌으로 운영되고 있다. 또 천부교의 대표적인 기업인 시온합섬은 1957년 12월 제1신앙촌[부천 소사]에 설립되었지만, 기장에 제3신앙촌이 설립되면서 1970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여러 공장과 주택 단지의 이전과 건설이 이어졌다. 교육 사업으로 시온어린이집, 시온중학교, 시온식품과학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부산에는 대신교회, 가야교회, 서면교회, 광안교회, 동래교회, 부곡교회, 기장교회, 일광교회, 죽성교회가 있다.
[의의]
이 외에도 기독교계 신종교로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등이 있다. 부산은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의 모여든 중심지로서 당시의 열악한 상황과 종말론적인 분위기는 신종교의 발흥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통일교를 손꼽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 또한 이 시기 한국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후일 기장신앙촌[박태선 전도관] 운동도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지금은 부산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사회적 영향으로 부산은 전통 종교를 바탕으로 여러 다른 종교와 함께 종교 다원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