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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0909
한자 圓佛敎
영어의미역 Won Buddhism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봉구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불교 계통의 신종교.

[개설]

원불교는 교조(敎祖)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에 의해 1916년 3월에 창립된 종교이다. 박중빈은 1891년 3월 27일[음]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 영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박성삼, 모친은 유정천으로 농촌의 소박한 가정이었다. 이 시기는 봉건 질서가 무너지고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침탈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러한 때에 우리의 고유한 민족혼을 다시 일깨우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사상을 창도한 흐름이 있었다.

이 중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사상은 특유한 후천 개벽설에 의해 조선의 낡은 봉건 질서를 종교적으로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 사상은 동학 혁명으로 나아가 정치적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요인으로 동학 혁명이 실패로 끝남에 따라 민중의 좌절감은 매우 컸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에 이르러 후천 개벽 사상은 천지 공사(天地公事)라는 종교적 상징화의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강일순의 천지 공사는 신비적 주술성의 요소가 강했기 때문에 일반 민중의 폭넓은 사회적 실천성의 영역으로 이끌지 못하였다.

박중빈은 이러한 사회 및 종교적 혼란 속에서 구도하고 깨달음을 얻어 원불교를 창립하게 되었다. 그는 1917년 8월에 저축조합을 창설하고 저축조합을 통해 허례 폐지, 금주·단연 등의 훈련을 거쳐 기금을 확보한 후 길용리 해면의 간척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것은 교단의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했다는 의미 외에 종교의 현실적 실천성을 강조하려는 뜻의 표현으로 평가되고 있다. 정신과 육체를 아울러 건전하게 성장시킨다는 영육 쌍전(靈肉雙全)의 이념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방언 공사를 통해 경제적 기초와 인간 생활에 뿌리박는 실천적 이념을 확립하고 법인 기도를 통해 우주의 근원인 하늘의 세계에 뿌리박음으로써 정신개벽이라는 이념의 기초를 다진 박중빈은 5년간 부안, 변산에 거처하면서 교법의 체계를 세웠다. 그 후 1924년 현 전라북도 이리시 신용동에 총부를 세우고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라는 임시 교명 하에 교화와 민중 훈련에 착수하였다. 2대 정산 송규(宋奎)[1900~1962] 때 해방을 맞아 ‘원불교’라 명명하고 3대 대산 김대거(金大擧) 종법사, 4대 좌산 이광정, 현 경산에 이르고 있다.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선포한 소태산 대종사의 정신에 따라 처음부터 간척 사업, 육영 사업, 저축 사업 등과 같은 현대 사업화에 절실히 필요한 사업들을 근거로 종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영육 쌍전, 이사 병행(理事竝行)의 실천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현실로 옮긴 대표적 종교이다.

원불교의 교리 체계를 보면 ‘일원상(一圓相) 진리(眞理)’는 신앙의 강령이며, 수양, 연구, 취사의 삼학은 수행의 강령이고 자력 양성, 지자 본위, 타자녀 교육, 공도자 숭배(公道者崇拜)의 사요(四要)는 신앙문의 실천 덕목이다. 이밖에 삼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그 목적을 성취하는데 원동력이 되는 신(信), 분(忿), 의(疑), 성(誠)의 네 조목을 진행 사조(進行四條)라 하고, 반대로 방해가 되는 불신, 탐욕, 나(懶), 우(愚)의 네 조목을 사연 사조(捨捐四條)라 하여 삼학 수행이 원만히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해방 이후 원불교가 전개한 사업과 활동은 대체로 교단 정비 사업, 사회사업, 학술 교육 사업, 그리고 종교 대화 운동 등 4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변천]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 익산총부를 건설한 이후 서울에 이어 부산에도 교단을 창설하고자 하였다. 부산 지방의 교화는 이타원 장적조(張寂照)와 삼사 김기천(金幾千)에 의해 이루어졌다. 장적조는 경상남도 통영 출신으로 처음 증산교를 신봉하였으나 1921년 경 완타원 이만갑(李萬甲)의 안내로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에 귀의하였다. 그는 1929년 봄 부산에 내려와 아들집에 머물면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맨 처음으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황대일화, 김선주화, 김정일화 등 세 사람을 입교시켰다. 이어서 윤문시, 박허주, 구양근, 김성명화, 양원국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교도를 얻었다.

1931년 8월경까지 40여 명이 입교하게 되었고, 이 무렵 소태산 대종사는 당시 불법연구회 회장이던 경산(慶山) 조송광(曺頌廣)과 함께 최초로 부산을 방문하여 현재 부산교당의 초기 이름인 남부민교당의 초대 회장 박허주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렀다. 이를 계기로 교도는 80여 명으로 늘었고, 하단교당[현 당리교당]이 창설되었다. 낙동강 하류인 하단에 위치한 하단교당이 변두리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부산 시내에 거주하던 윤문선, 김성명화, 박허주, 임현기화 등 여러 교도들은 시내 부민동에 교당을 세울 것을 의논하고 1934년 5월에 남부민동에 융타원 김영신을 교무로 초빙하여 법회를 보기 시작하였고, 9월에 교당을 신축하고 남부민교당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한편 초량교당은 이정혜, 이삼중행, 이영우, 김통제화, 김삼도화 등과 정관음행, 임칠보화 등을 중심으로 노력한 결과 1936년 남부민교당의 김영신 교무를 초대 교무로 하여 창설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서울에는 1개의 교당이 있었지만 부산에는 3개의 교당이 있었다.

광복 후 정산 종사가 ‘건국론’을 발표하였는데 건국론은 원불교 교리에 기초한 건국 치민(建國治民)의 방법론을 당시의 정계 요인들과 교단 동지들에게 널리 호소하여 제시한 경륜이다. 이에 교단에서는 정산 종사의 건국론 정신에 입각하여 건국 사업을 적극 전개하였다. 건국 사업은 전쟁 동포 구호 사업, 고아원 경영, 한글 보급 운동 등 세 가지 방면에서 전개하였다. 3개월 동안의 구호 사업에 이어서 전쟁 동포 돕기 모금 운동에 나서 당시 3만 5,000원의 성금을 모아 시청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초량교당을 연원으로 다대교당[1947년], 부산진교당[1953년], 서면교당[1953년], 대산교당[1956년]이 신설되었고 부산진을 모체로 동래교당[1955년]이 부산 동부의 교화 터전으로 만들어졌다. 1956년에 서면교당에서 대구에 출장 법회를 하였다.

6·25 전쟁 이후 부산 지방에는 새로운 교당들이 차례로 창설되기 시작하였고 1963년 3월부터 1971년 2월까지 8년간에 걸쳐 교단은 연월 달기, 교화단 불리기, 연원 교당 만들기의 교화 삼대 목표 추진 운동을 거교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기간에 8만 여명의 교도가 증가되었고, 1,457단의 교화단이 불어났으며, 92개의 새 교당이 창설되어 교세를 크게 발전시켰다. 부산 지방에 많은 교당이 창설된 것도 교화 3대 목표 추진 운동의 결과였다. 이에 1962년에 구포, 영도교당을 비롯한 반백년 기념 대회가 열린 1971년에 3개 교당[해운대, 청학, 거제]이 신설되었다.

1977년은 교단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였는데, 개정 교헌에 따른 29명의 새 수위 단원 선출, 법위 사정의 양성화, 11개 교구장의 임명 등이었다. 이에 따라 부산교구는 이경순이 교구장으로 임명되고, 부산교당이 교구교당으로 되었다. 한편 남부민교당이란 이름으로 창립된 부산교당은 광복 이후 경남교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1977년 6월부터는 부산교당으로 개명하였다.

교구 제도 실시 이후 부산교당은 교구 중심 교당으로서 대부분의 행사를 교구 이름으로 거행하였다. 교세가 커지자 자연히 부산교당의 신축 필요성이 거론되었다. 제2대 교구장인 균타원 신제근이 1980년 4월 8일 원불교 부산회관 봉불식을 마쳤고 교구청과 부산사무소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부산교구는 50개의 교당에 이르게 되고 기존 교구 규정에 정해진 30개 교당을 훨씬 상회하여 단일 교구 체제로는 전체를 관할하는 데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교정원에서는 교구 규정을 대폭 완화하여 기존 14개 교구에서 지역적 특성에 따라 20개 교구로 분할하여, 원활한 교구 운영과 교화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1월 16일, 제115회 원의회에서는 해외 교구를 제외한 교구 조정을 시행하여 부산교구를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으로 크게 나누었다. 그리고 남구, 해운대구, 동래구, 금정구, 울산시, 울주군, 양산에 위치한 교당을 동부교구로, 중구, 영도구, 동구, 부산진구, 서구, 사하구, 북구, 김해시에 위치한 교당을 서부교구로 하여 종전 50개 교당을 동부교구에, 28개 교당을 서부교구에, 24개 교당과 밀양 권역을 마산교구로 귀속시켰다. 삼랑진교당은 마산교구에 귀속되었다. 교구장으로는 서부교구에 향타원 박은국 교무가, 부산동부교구는 동래교당을 교구청 소재지로 하여 초대 교구장에 건타원 김대관 교무가 부임하였다.

[현황]

1995년 국가의 행정 구역 변경에 따른 교단의 교구 제도가 개편되었다. 따라서 부산광역시와 양산시, 울산시를 묶어 동부와 서부의 통합 부산교구가 만들어졌고, 교산 이성택 교구장이 부임하였다. 교구는 삼하나 운동을 전개하여 교화 활성을 기하였으며, 그 결집으로 2000년에는 2000년 대법회를 거행하게 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 부산원음방송국의 개국과 금곡 청소년 수련관 수탁으로 일반 교화 및 청소년 교화에도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다.

또 교구장으로 심타원 박순정 교무가 부임하여 각 가정 앞에 원불교 문패 붙이기와 감사 생활 낙원 가정 스티커 붙이기 운동 등 가족 교화에 중점을 두고 교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교단은 국가로부터 군종 장교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즉시 교구에 군 교화의 문을 열어 울산 지역과 언양 지역에 군 교화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월산 김일상 교무가 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임 당년에 교구 임시 기획 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화 컨설팅을 의뢰하여 원기 100년을 향한 교구의 교화 방향을 설정했는데 그 핵심은 교화단 교화와 지역 공동체 교화[지구 교화]이다. 또한, 교화 발전에 종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조직으로 기획위원회, 교화후원회, 교구청 건립추진위원회를 동시에 출범시켰다. 그리고 교화 성장을 실현시키는 정신으로 ‘4ㅎ정신-해야 한다·하면 된다·할 수 있다·행동한다’를 제시했다. 주된 사업으로 교화 전략 교당 운영, 교당별 비전 수립 추진, 단장 서원단 운영, 3040세대 교화, 미자립 교당 면모 갖추기[신평, 가야, 만덕, 괴정 신축], 봉공 회관 건립을 통한 대 사회 교화, 하단 성적지 순례 및 복원, 지구교화협의회 운영 등에 역점을 두고 진행했다. 2013년에는 교구장 숙타원 정숙현 교무가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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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부산시사』3(부산직할시사편찬위원회, 1991)
  • 원불교(http://www.w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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