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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228
한자 金光敎
영어의미역 Geumgwang-gyo Bridge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 2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지영

[정의]

일제 강점기 포교를 위해 부산 지역으로 진출한 일본 교파 신도의 한 교파.

[개설]

금광교(金光敎)는 1882년 정부포고령에 따라 국가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로, 에도 시대[江戶時代] 말기 선진 농촌 지대에서 발생한 민중적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신흥 종교이다. 교조 아키자와 분지[赤澤文治]는 민간에서 악신으로 알려져 있는 금신(金神)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고 자비심이 깊은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으로 바꾸어 민중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천지금내신과 인간 사이에 '금광대신'이 중개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현재는 '교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금광교에서는 천지금내신에게 빌면 현실적인 인간의 기원이나 소망을 실현시켜 준다고 가르쳤다.

[조선 포교의 배경과 목적]

금광교의 조선 포교는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포교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18일 금광교 관장 금광대진(金光大陳)은 내무 대신으로부터 금광교 교규 교칙(敎規敎則)에 대한 인가를 받았는데, 금광교의 조선 포교 성격은 1911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게 제출한 포교 인가원(布敎認可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 방침을 신도에게 잘 따르고 잠시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매월 예제일(例祭日)에 합방의 조서(詔書)와 함께 합방 당일에 공포된 유고(諭告)를 봉독하는 행사를 치루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단순한 해외 포교의 차원이 아니라 식민지의 통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활동 사항]

금광교 부산교회소는 1903년 3월 전전오조[前田吾助]가 교관장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같은 해 5월 15일 부산 주재 일본 영사의 동의를 얻어 부평동에 설치되었다. 이후 전전오조는 직접 교회장이 되어 포교에 최선을 다했는데, 1911년 12월에는 토성동에 교회소를 신축하였다. 매월 3일과 10일, 22일에 월차제(月次祭)를 지냈고, 봄과 가을에 대제(大祭)를 개최하여 교의(敎義)를 설파하였다.

또한 때때로 강연회를 개최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에는 국민 사상 함양을 위한 ‘호국의 신념’ ‘생명의 기본’, 1938년 3월에는 ‘일본 정신을 기르는 것’이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38년 10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체제에 부응하여 ‘화합의 덕, 결합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1941년 5월에는 국위 선양과 무운 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는 대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금광교는 부산교회소 외에 1923년에는 초량포교소, 1933년에는 부산진포교소를 설치하였다.

[현황]

금광교 부산교회소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서구 토성동 2가 2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현재 그 터에는 빌라와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1.19 문장 서술 수정 천지금내신, 금광대신 관련 서술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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