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7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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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光敎釜山鎭敎會 |
영어의미역 | Busanjin Curch of Geumganggyo |
이칭/별칭 | 금광교 부산교회 부산진포교소,금광교 부산진포교소 |
분야 | 종교/신종교,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병욱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에 있었던 금광교 소속 교당.
[설립 목적]
일본 바쿠후[幕府]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한 습합 신도, 즉 ‘신종교(新宗敎)’는 봉건 체제 붕괴에 따른 사회 혼란과 근대화 프로젝트의 부작용 등을 파고들어 신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음으로써 단기간에 발전을 이루었다. 금광교(金光敎)[곤코교] 역시 그 중 하나로, 교조 아카자와 분지[赤澤文治]는 민간에서 악신으로 알려져 있는 금신(金神)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고 자비심이 깊은 천지금내신(天地金乃神)[텐치카네노카미]으로 바꾸어 민중을 구제하려고 하였다. 천지금내신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금광교에서는 그 신에게 빌면 현실적인 인간의 기원이나 원망을 실현시켜 준다고 가르쳤다. 1882년 일본 정부 포고령에 따라 국가 신도(國家神道)에서 분리된 13개 교파 신도(敎派神道) 중 하나가 되었으며, 조선 개항 이후 일본의 타 신종교와 함께 식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에 진출하여 그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였다.
[변천]
1933년 8월 15일 동래군 서면 부전리 494번지[현재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동]에서 죽내무(竹內茂)를 포교 담임자로 하여 금광교 부산진포교소(金光敎釜山鎭布敎所)[금광교 부산교회 부산진포교소]의 설치를 인가받았다. 1937년 2월 19일 포교 담임자가 소원좌근(小原左近)으로 변경되었으며, 같은 해 4월 23일 부산부 좌천정 206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로 이전되었다. 1942년 4월 2일에는 금광교 부산진교회(金光敎釜山鎭敎會)로 개칭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종교 의례와 포교가 그 주된 활동이었다. 부산부의 조사에 따르면 1936년 신도 수가 일본인 224명과 조선인 4명이었는데, 이를 통해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부전동·좌천동 등 부산진 지역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 집주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신도가 대단히 소수에 그쳤다는 것은 조선인에 대한 금광교의 교세 확장에 명백한 한계가 있었음을 말해 준다.
[현황]
금광교를 포함한 일본의 신종교는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의의와 평가]
메이지기 이래 금광교 등 일본의 신종교는 천황제 근대 국가를 지지하였으며, 본국을 넘어 식민지에서까지 통합 이데올로기로 활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현황 파악을 통해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의 일제의 문화적 침투의 양상을 알 수 있어, 향토사 연구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