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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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祈雨祭 |
영어의미역 | Ritual for Rain |
이칭/별칭 | 무제,물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기장군 정관읍 용수리|금정구 두구동 |
집필자 | 안미정 |
[정의]
부산 지역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올리는 의례.
[개설]
기우제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남구 용호동,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등지에서 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의 파종이나 성장에 해가 있을 때 비가 오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의이다. 이를 무제, 물제 등이라고도 한다. 고대 이래로 조정과 지방 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이 들면 기우제가 성행하였다. 부산 지역에는 조선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고을 단위로 기우제를 지내는 7군데의 기우소(祈雨所)가 있다. 바로 절영도의 태종대(太宗臺), 금정산의 번우암(飜雨岩), 동래부 남쪽의 승악산(勝岳山)과 지도신사(知島神祠), 상산[장산] 정상의 입암(立岩), 척산(尺山)[배산]의 겸효대(謙孝臺) 등지에서 기우제를 올렸으며, 자연 마을마다 별도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수리 시설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농사에 필요한 농수를 비에 의존하였고, 이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비에 대한 관심은 「단군 신화」의 환웅이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는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도 왕이 직접 제를 올렸다. 기우제는 구름이나 비를 만드는 큰 산이나 강, 바다에서 지냈고, 종묘에서도 종종 행해졌다.
민간이나 지방 관청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는 “기우소 6곳이 기록되어 있는데, 절영도의 태종대와 금정산에 있는 번우암, 동래부 남쪽 40리에 있는 승악산, 상산[장산] 정상에 있는 입암, 척산[배산]에 있는 겸효대, 동래부 남쪽 30리에 있었던 지도신사 등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 기우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2001년 부산남구민속회에서 집필한 『남구의 민속과 문화』에 의하면, 용호동에서는 옛날부터 가뭄과 관계없이 매년 음력 4월 초열흘에 기우제를 지냈다. 이 행사는 60세를 전후한 여인네들이 주관하였고, 기우제를 지낸 후에는 춤을 추고 풍물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장소는 장산봉의 8부 능선쯤이었지만, 요즈음은 거기까지 올라가지 않고 무덤 밑 ‘장량 터 먼디’에서 지내고 있다. 특별한 형식이나 음식의 준비는 없으며, 축문도 읽지 않고 있다.
[절차]
당산제와 같이 먼저 제관을 선출하고, 소머리·돼지·닭·술·과실·포·식혜 등의 제물을 차리고 강신(降神), 헌주(獻酒), 독축(讀祝), 음복(飮福) 등의 절차로 진행된다. 금정구 두구동에서는 날이 가물 때 택일을 하고, 마을 남자 가운데 선정된 2~3명의 제주가 높은 산에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다. 두구동에서는 이를 ‘무제’ 또는 ‘물제’라고 하였다.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서는 청장년들이 높은 산[석은덤] 위에 올라가 제물을 진설하고 소가죽을 말뚝에 덮어씌운 뒤 유교식으로 제의를 올린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가뭄이 들면 택일하여 기우제, 곧 무제를 지냈다. 이날 집집마다 대문 또는 사립문에 금줄을 치고 솔잎이 붙은 솔가지를 물병에 꽂아 그 병을 금줄에 거꾸로 매달아 물이 솔잎을 타고 흘러 떨어지게 하였다. 이것은 낙수가 떨어지는 듯한 유사 주술 행위로 비를 바라는 것이다. 마을의 청장년들과 제주는 산봉우리[연대봉, 장산, 금령산, 달음산 등]에 올라가 돼지머리를 비롯한 제물을 성대히 차리고 기우제를 지낸 뒤 솔가지를 모아 불을 질러 검은 연기를 피우고 풍물을 치며 놀았다.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하는데, 이 비가 내리면 그해 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태종우는 조선 태종(太宗)이 병석에서 비를 염원하다가 오월 초열흘에 승하하자 곧 비가 온 데서 나온 말로, 태종의 기일이 되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