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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3·1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0712
한자 梵魚寺三一運動
영어의미역 March 1st Movement at Beomeosa Temple
이칭/별칭 범어사 학생 만세 운동,동래 범어사 학생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금정구 복천동|수안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대민나철회정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 운동
관련인물/단체 한용운|오성월|이담해|오이산|김법린|김영규|김상기|김한기|범어사|지방학림|명정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연표보기 -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연표보기 -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만세 시위 시도
특기 사항 시기/일시 범어사 3·1 운동 이후 -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해체
발생|시작 장소 범어사 동래포교당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지도보기
종결 장소 동래 만세 거리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종결 장소 동래 만세 거리 -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정의]

1919년 3월 범어사 승려와 학생들이 주도하여 동래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을 앞둔 2월 하순경 불교계를 대표하는 한용운(韓龍雲)범어사로 내려와 오성월(吳惺月)을 비롯하여 이담해(李湛海), 오이산(吳梨山)을 만나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이에 범어사 주지 오성월, 이담해 등은 김법린(金法麟), 김영규(金永奎), 차상명(車相明), 김상헌(金祥憲), 김상기(金相琦), 김한기, 김봉한 등 범어사 승려와 명정학교범어사 지방학림의 학생 7명을 범어사의 대표로 서울의 3·1 운동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들은 3월 4일 독립 선언서 등 문건과 만세 시위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이 무렵 서울의 만세 시위 소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부산에서도 3·1 운동의 열기가 달아올랐다. 이에 부산에서는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 학생들과 기독교도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3월 13일 동래고보[현 동래고등학교]의 만세 시위가 이어졌다. 이에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범어사 관계자들이 3월 8일 동래 장날에 맞추어 만세 시위를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경과]

범어사의 승려와 학생들은 새로운 거사일을 역시 동래 장날인 3월 18일로 잡고 동래 장터 일대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마침 하루 전날인 3월 17일은 범어사 명정학교범어사 지방학림의 졸업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날 밤 개최된 졸업생 송별회 자리에서 김영규가 축사 도중에 만세 시위를 독려하고, 다른 주동자들도 시위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자 참석한 학생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에 시위의 주동자들은 어둠을 틈타 두 편으로 나누어, 18일 새벽 동래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잠입하였다. 하지만 이미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이 사실을 누설하였기 때문에, 출동한 일본 헌병과 경찰에 의해 김영규, 차상명, 김상기, 김한기 등은 연행되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이에 검거를 피한 이근우, 김해관, 김재호, 윤상은 등 40여 명의 명정학교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과 함께 동래읍성 서문 부근에서 동래 시장을 거쳐 남문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19일 오전 허영호가 주도하여 다시 한 차례 더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고, 그 후 각각 두 차례의 시위를 더 감행하였다.

[결과]

시위 후 주동자 35명은 대부분은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거쳐, 부산감옥소와 대구감옥소 등에서 징역 6월~3년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이 의거가 있은 후 명정학교범어사 지방학림을 해체시켰다.

[의의와 평가]

범어사 3·1 운동은 부산진일신여학교와 동래고보의 3·1 운동에 이어 구포 장터, 기장면, 정관면, 좌천면 등 부산 전역으로 이어진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20~30년대 부산 및 동래 지역 항일 청년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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