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034 |
---|---|
한자 | 吳惺月 |
영어음역 | Oh Seongwol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미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범어사에서 불교 개혁 운동과 항일 운동을 전개한 승려.
[활동 사항]
오성월(吳惺月)[1865~1943]은 1865년 7월 15일에 경상남도 울산군 온산면 강양리[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에서 태어났다. 1885년 9월 30일 범어사에서 출가하였고, 1886년 4월부터 1893년 7월까지 경상북도 예천군의 용문사(龍門寺)에서, 1893년 8월부터 1897년 7월까지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강원 과정을 마치고, 여러 선원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다. 1887년 4월 8일 통도사에서 대승계와 소승계를 받은 뒤 1899년 10월 15일부터 범어사에서 수선 안거(修禪安居)[선을 수련하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 한 곳에 들어앉음]하였다. 1906년 1월 15일 오성월은 범어사 전계화상(傳戒和尙)에, 1909년 7월 30일 범어사 섭리(攝理)에, 1911년 11월 7일 범어사 주지에 취임하였다.
1913년 1월 22일 범어사의 법계 시험에 의하여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으며, 1915년 범어사 주지에 다시 올랐다. 오성월은 1900년대 초반 범어사 안에 안양암(安養庵)·내원암(內院庵)·계명암(鷄鳴庵)·원효암(元曉庵) 등 7개의 선원(禪院) 개설을 주도하고, 『선문 촬요(禪門撮要)』의 간행을 주도하여 범어사가 선종의 중심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오성월은 적극적으로 각지에 포교당을 세우고, 명정학교나 강원 등을 중심으로 한 교육 활동에 힘써 범어사의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일제의 사찰령에 반대하는 임제종 운동을 범어사가 주도하는 과정에서, 오성월은 범어사 주지이면서 임제종 중앙 포교당의 책임자로서 이 운동을 이끌었다.
또 1919년 당시 범어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범어사 3·1 운동에 배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상해 임시 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의 활동도 하였고, 임시 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범어사의 선풍을 일으켰던 오성월은 1943년에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