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2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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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臨濟宗運動 |
영어의미역 | Movement of the Imje Buddhist Order |
분야 | 역사/근현대,종교/불교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진모 |
[정의]
일제 강점기 초기 부산 범어사 등지에서 전개된 불교 개혁 운동이자 민족 운동.
[역사적 배경]
구한말 한국의 승려들은 일제의 사찰 정책이 한국 침투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고, 심지어 1911년 「사찰령」이 조선 불교를 중흥시킬 것이라 여겼다. 이런 가운데 1910년 10월 6일 원종의 대종정인 이회광이 일본의 조동종과 한국 불교의 통합을 꾀하는 조동종 맹약을 체결한 사실이 알려지자 각처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그 중심은 한용운(韓龍雲), 박한영 등 지리산 일대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이회광의 소행이 한국 불교를 일본에 팔아먹는 매종(賣宗) 행위라고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다.
[경과]
원종에 대한 조선 불교계의 대응은 1910년 12월 무렵 광주 증심사 승려 대회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1월 15일 송광사에서 개최된 ‘조동종 맹약 규탄 대회’는 한국 불교의 전통이 임제종에 있음을 강조하고, 원종에 대치할 새로운 조직체로 임제종을 표방하였다. 이에 임제종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고 한용운을 임시 종정으로 삼았다.
이후 포교당을 신설하여 불교의 대중화를 기하고, 사법(寺法)과 승규의 제정을 시도하는 등 임제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10월경 임제종 임시 종무원은 부산의 범어사로 이전하였다. 이는 새로운 선풍(禪風)을 구가하면서 선찰 대본산으로 위상을 강화한 범어사의 위상을 임제종의 발전에 활용하려 한 의도였다. 이후 1912년 5월 26일 서울 인사동에 임제종 중앙포교당을 개교함으로써 임제종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결과]
일제는 초기부터 포교당 건립 모금을 불허하고, 한용운을 검거하는 등 탄압을 가했으며, 1912년 6월 21일 드디어 원종과 함께 종무원의 문패 철거를 명령하였다. 이로써 임제종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후 한용운은 임제종을 선종으로 변경하고 그 경영의 본사를 범어사로 하여 포교 활동을 이어갔지만, 1912년 8월경 그나마 종막을 고하였다.
[의의와 평가]
비록 단명하였지만 임제종 운동은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민족 불교를 지향함으로써, 불교 개혁 운동과 불교 청년 운동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