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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413
한자 日帝强占期-佛敎
영어의미역 Buddhism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연주

[정의]

1910년부터 1945까지 일본 제국주의 식민 통치 시기의 부산 지역 불교.

[개설]

1905년 을사늑약조약 체결 이후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하여 식민지로 강점하였다. 일제는 1911년 제정 반포한 「사찰령」과 그 시행 규칙을 통해 한국 불교의 행정 체계를 조선총독부에 종속시키고 승려의 세속화를 권장하면서 그 전통을 붕괴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불교계는 한국 불교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였으며, 지역 불교계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범어사는 사찰 본래의 정체성을 지키고 구현하고자 자주적인 임제종 노선을 지키면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려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909년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의 주도하에 선풍 진작 도량으로 전환하면서 불조 혜명을 잇는 중심 도량으로, 선 수행의 거점 도량으로 그 위상을 정립하였다. 당시 식민지 불교 정책의 구도에서 나온 선교 양종이라는 종명을 사용치 않고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梵魚寺)’라는 종지를 내세우면서 그 독자성을 지켜냈다.

한편 일제 강점기 범어사는 교육 부문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명정학교(明正學校) 설립을 통해 주로 무산 자녀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면서 종교적 기능뿐 아니라 교육 계몽적인 기능까지도 담당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근대 교육 운동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해 배출된 청년 승려들이 민족 운동에 깊이 관여하는 바탕이 되었다. 지역의 3·1 운동 당시 범어사명정학교의 젊은 학승 및 학생들에 의해 전개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 불교계를 황폐화하려는 시도에 대응한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고, 특히 부산 지역은 범어사 주도로 대응하여 부산 불교의 정체성은 물론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사찰령」과 불교계 대응]

국권 상실은 불교계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제는 그동안 일본 승려들이 담당했던 역할을 한국 불교 교단과 승려들에게 강요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또한 충실한 일본 신민을 만드는 정신적 계몽 사업으로서 불교 정책을 수행·추진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요구에 따라 「사찰령」 등 일련의 법령이 정비되었다.

1911년 6월 3일 「사찰령」을 제정 반포하고, 그 시행 규칙은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불교 학자였던 도변창(渡邊彰)으로 하여금 작성케 하였다. 「사찰령」 등의 실시로 법통(法統)의 전승이 중시되어야 할 본말사(本末寺)의 관계가 행정적인 조직이 되었고, 주지는 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관료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 정책은 한국 불교의 행정 체계를 총독부에 종속시키고, 승려의 세속화를 권장하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사찰 재산을 임의로 처분치 못하게 한 것은 사찰의 재산이 비밀리에 항일 독립운동의 비용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결코 불교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부합되도록 이루어진 식민지 통치 방식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사찰들은 일제의 「사찰령」에 묶이게 되어 불교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종단 건설을 지향한 원종 계열의 승려들은 일제의 사찰 정책에 대부분 동조하였고, 또 일부는 일본의 조동종에 연계하여 한국 불교의 자주권을 지키지 않고 일본 불교에 의존하였다. 일본의 정토진종(淨土眞宗)은 1878년 12월에 대곡파(大谷派) 본원사(本願寺) 분원을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대각사(大覺寺)에 설치하여 포교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범어사는 일제의 불교 정책에 맞서 사찰 본래의 정체성을 지키고 구현하고자 자주적인 임제종 노선을 지키고자 일정한 저항을 하고, 이 과정에서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범어사의 독자성 유지 노력]

범어사는 1900년대 초부터 다수의 선원(禪院)을 개설 운영하였다. 경허 스님이 1900년에 선원을 개설한 이후 범어사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의 주도하에 여러 선원이 개설되었다. 1899년 금강암주 월송의 합의로 금강암선원, 1901년 해인사 수좌와 함께 발기하여 내원암선원, 1905년 이담해, 포응 등과 함께 내원암선원, 1909년 이담해와 함께 발기하여 원응료선원, 1910년 금어암선원 등을 발기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범어사 내 선원 대상 9개 처 중에서 7개 처의 선원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오성월의 이러한 노력과 주도하에 1900년대의 범어사는 선풍 진작 도량으로 전환되었고, 불조 혜명을 잇는 중심 도량으로, 선 수행의 거점 도량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일제의 민족 독자성을 말살시키려는 식민지 정책이 더욱 강화되고 있을 때 범어사한용운·오성월 등과 백양사의 박한영 등이 중심이 되어 영남·호남 승려들이 1911년 1월에 순천 송광사에 모여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곧 1911년 음력 1월 25일에 범어사는 전 불교계에 ‘선종 수찰(禪宗首刹)’이라는 공문을 보내 그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총독부는 임제종을 해산시켰지만, 당시 주요 불교 인사들은 1912년에 임제종의 임시 총무원을 범어사로 옮기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적극 대응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본사는 일제가 정한 종명인 조선 불교 선교 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사찰 명을 ‘선교 양종 ○○대본산 ○○사’라고 하였으나, 범어사는 식민지 불교 정책의 구도에서 나온 선교 양종이라는 종명을 사용치 않고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 범어사(梵魚寺)’라는 종지를 내세우면서 그 독자성을 지켜 냈다.

[범어사의 사원 경제 확충과 근대 교육]

일제 강점기 범어사는 교육 부문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명정학교 설립을 통하여 근대 교육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이 학교는 주로 무산 자녀들을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이보담·홍월초 등이 선진 교육 제도 도입에 크게 자극을 받아 1906년에 설립하였다. 그리고 1917년에는 통도사·송광사·석왕사 등 3개 사찰과 연합하여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해 경영할 정도로 교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1921년에는 ‘싯달 야학교’라는 포교당을 동래에 설치하였는데, 이는 종교적 기능뿐 아니라 교육 계몽적인 기능까지도 수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서울 인사동 범어사 포교당선학원으로 바꾸었다가 안국동으로 이전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교육에 다양한 활동을 한 이유는 근대 불교로 지향하는 과정에서 범어사는 근대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1800년대 초부터 사원 경제 복구를 위해 조직한 갑계(甲契)를 통해 재산 증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13년 무렵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은 각 암자와 방(房)마다 별도로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범어사 단독 명의로 통합하여 공동 경영을 주도하였다. 그 배경은 학교 사업을 위한 것도 있지만, 사찰의 재산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범어사는 유학생의 학비, 포교당비, 학림비 등에 많은 경비를 지출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범어사는 근대 교육 운동에만 그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배출된 청년 승려들이 민족 운동에 깊이 관여한 사실에서 독립운동 전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1 운동과 범어사]

그것은 3·1 운동 당시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중앙 학림과 지방 사찰, 지방 학림, 그리고 범어사가 설립한 명정학교의 젊은 학승 및 학생들이 적극 참여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1919년 2월 하순 무렵 서울에서 한용운 스님이 범어사로 내려와서 그 당시 주지였던 오성월 스님과 이담해·오이산 등에게 3·1 운동에 관하여 연락하고 올라갔다. 한용운을 통하여 3·1 운동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차상명·김영규·김봉한 등과 범어사 지방 학림 대표로 김상기, 그리고 명정학교 대표인 김한기 등이 모여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범어사 대표로서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고 나서 각자 흩어져 범어사로 내려왔다. 당시 범어사 관련 인사들이 3·1 운동 전개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3·1 운동 당시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운동은 부산 지역의 독립운동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범어사 주도의 만세 시위운동은 동래 일원 만세 사건 중 규모가 가장 큰 의거였다. 당시 범어사 파견원 김상헌, 김법린 두 사람은 절 내에 있는 명정학교 학생들과 동네 유지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선언서 5천 장을 등사한 후 3월 6일 오후 절 내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다음날인 3월 7일은 동래 장날이기 때문에 밤을 틈타 몰래 동래로 잠입하여 장꾼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이날 거사는 차상명, 김봉한의 주도하에 김영규·허영호·윤상은·오병준 등 30여 명이 시장 중앙에서 선언문을 배포하고 만세를 제창한 후 여러 참여자와 함께 경찰서로 돌입하였다.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 시위운동은 3월 18일에도 일어나 100여 명이 체포되고 김봉한·허영호·차상명·김한기·황원석 등 3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처럼 동래 지역의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분위기에서 타 지역에 비해 서울에 이어 비교적 빠른 시기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범어사가 불교 진흥 운동과 근대 교육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범어사 승려들이 서울의 운동을 주도한 핵심부로 일부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불교계는 범어사가 중심이 되어 일제의 한국 불교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고, 근대 교육을 통해 지역의 인재 육성은 물론 3·1 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에 의해 조선 불교계를 황폐화하려는 시도에 대응한 노력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으나, 부산 지역 불교계는 범어사가 중심이 되어 이에 적극 대응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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