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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133
한자 高麗時代-佛敎
영어의미역 Buddhism of the Goryeo Dynasty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최연주

[정의]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불교.

[개설]

고려 시대 부산은 후삼국 정립기에 고려 왕실과 다소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중앙으로부터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여기에 고려의 국토 계획 및 운영 원리에 따라 당시 수도였던 개경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부산 지역은 자연히 주목받지 못하였다. 부산 지방 세력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채, 한반도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던 변방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부산 지역의 불교계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침체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 후기에 이르면 왜구의 침입 횟수 및 대상 지역이 동남 연해안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부산 지역은 왜구들의 직접적인 노략질이 다른 지역보다도 심했을 것이다. 만덕사지의 규모로 보아 금정산 범어사(梵漁寺)에 못지않은 큰 사찰로서 고려 후기 부산 지역에 자주 침범하던 왜구의 퇴치를 위해 세워졌던 비보사찰(裨補寺刹)의 하나로 범어사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부산 지역의 사원]

고려 건국과 함께 정치 중심지가 경상북도 경주에서 지금의 개성직할시 즉, 개경으로 옮겨 감에 따라 부산 지역은 통일 신라만큼 중앙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고, 고승 대덕들도 대부분 개경 근처에 머물면서 지방의 불교계는 더욱 침체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산 지방 세력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채, 한반도의 동남에 위치하고 있던 변방의 땅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예로 부산의 핵심 지역이었던 동래현은 울주(蔚州)의 속현으로 전락하였고, 속현인 동평현(東平縣)을 양주(梁州)에 떼어 준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해 보면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불교계는 매우 침체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사원은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조선 전기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 불우조(佛宇條)에 금정산 범어사와 효의사(孝義寺)가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에 소재하고 있는 삼층 석탑의 양식과 제작 기법이 신라 석탑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어 이 일대에도 사원이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기왕에 존재했던 여러 사원 중에서 범어사장안사 등과 같이 규모가 큰 사원은 일정하게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유지되고 있었을 것이다. 의상 대사(義湘大師)가 초창(初創)한 뒤 흥덕왕 대에 중창된 범어사는 지역의 화엄 사찰로서, 그리고 기장현의 장안사척판암원효(元曉) 계통의 사원으로 계승되어 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산중 불교화로 변화되면서 고려 시대 사원의 분포, 종파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앞서 언급한 범어사를 비롯하여 효의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부산 지역의 위상과 지역의 불교 사원]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사원의 실체를 규명하기 힘든 실정이지만, 일부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고려 시대 부산 지역 불교계와 중앙 정부 관계 및 동향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위치한 만덕사(萬德寺)를 통해 부산 지역 불교와 중앙 정부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덕사지 발굴 조사 당시 출토된 대부분의 유물들의 내용과 특징을 종합해 본 결과 통일 신라 말기 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사원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고려 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원으로 짐작되나, 창건 연대와 폐사(廢寺)에 대한 기록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다. 만덕사의 위상이나 동향에 대한 내용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통해 충분히 짐작된다.

『고려사』 권91, 열전 2, 석기전(釋器傳)에 “석기(釋器)충정왕이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 그리고 『고려사』 권38, 공민왕 즉위년 12월조에 “신묘일에 영릉(永陵)[충혜왕]의 서자 석기를 머리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석기만덕사에 유폐시킨 사람이 충정왕공민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2, 충정왕 2년 12월에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두었다.”고 되어 있어 충혜왕 대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사』 권38, 공민왕 5년 6월에 “공민왕 때에 원이 장차 석기를 불러들이려 하였는데 왕이 듣고 드디어 소환하였다. 5년에 왕이 전호군(前護軍) 임중보(林仲甫)가 석기를 받들어 가만히 불궤(不軌)를 도모코자 함을 듣고 순군에 가두어 죄를 물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석기 추대 음모 사건이 있었고, 공민왕석기를 소환한 것을 통해 당시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친원(親元) 분자의 잔당을 숙청하려는 구실로 삼은 사건으로 보고 있다. 물론 1373년(공민왕 22)에 석기가 참수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석기 추대 음모 사건을 통해 고려 시대 부산 지역의 불교계는 중앙 정부로부터 주목받지 못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조선 전기에 만덕사와 관련된 더 이상의 기록이 없고, 출토된 유물 가운데 조선 시대의 것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 부산 지역에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국사(國師), 선사(禪師) 등과 같은 고승 대덕이나 유력한 불교계 인사 전무한 것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이 정치 중심지인 개경과 멀리 떨어져 있는 위치적인 측면도 있다. 여기에 지역 내의 유력 정치 세력과의 연계도 미흡하여 지역의 불교계는 상당히 침체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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