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173
한자 釜山鎭日新女學校義擧
영어의미역 Uprising at Busanjin Ilsiun Women’s Schoo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1동 768-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선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3·1 운동
관련인물/단체 주경애|박시연|김봉애|김반수|김응수|김신복|송명진|부산진일신여학교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 밤 9시연표보기 - 가두시위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연표보기 - 가두시위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서울 3·1 운동 발생
발생|시작 장소 좌천동 거리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종결 장소 좌천동 거리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정의]

1919년 부산의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전개한 3·1 운동.

[역사적 배경]

부산진일신여학교의 여성 교육을 통한 자각과 부산 지역 기존 여성 운동의 경험, 송죽회와 같은 비밀결사 활동 등은 여성들의 항일 의식을 고조시켜 부산진일신여학교 및 부산 지역 여성들이 3·1 운동의 발발과 전개에서 그 중심이 되게 하였다.

[경과]

3·1 운동이 발생한 직후 서울의 학생 대표가 부산으로 내려와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이에 부산진일신여학교의 교사 주경애, 박시연의 지도 아래 고등과 학생 심순의, 김봉애, 김복선, 김반수, 김응수, 김신복, 이명시,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김난줄 등은 태극기를 준비하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1일 밤 9시 이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호응하여 군중 수백 명이 힘찬 시위를 하였다.

[결과]

시위 후 이들은 모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징역 5월~1년 6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한편 의거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된 임말이, 임망이 자매는 형사인 형부에게 모의 사실의 전모를 진술하고 석방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산진일신여학교 생도들은 두 자매가 등교하자 10일 간의 동맹 휴학을 감행하여 이들을 학교에서 추방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부산진일신여학교 의거는 당시 경상남도 3·1 운동의 첫 화살을 던지게 되어 그 후 경상남도 각지에서 만세 의거가 일어나게 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