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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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班守 |
영어음역 | Gim Bansu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3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반수(金班守)[1904~2001]는 1904년 9월 19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3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에서 학생 대표가 내려와 3·1 운동을 알리고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위를 고무하였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인 박시연(朴時淵)·주경애(朱敬愛)의 지휘 아래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4학년 심순의(沈順義)·김봉애(金奉愛)·김복선(金福善), 고등과 3학년 김응수(金應守), 고등과 2학년 김난줄(金蘭茁)·김신복(金新福), 고등과 1학년 이명시(李明施)·송명진(宋明進), 학년 미상 김순이(金順伊)·박정수(朴貞守) 등과 더불어 시위 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11일을 시위 일자로 정하고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들어 준비하였다.
3월 11일 김반수는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좌천동 일대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 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 있는 같은 학교 학생이며 역시 이날의 만세 시위를 주동한 박정수의 집에 함께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 김반수와 박정수는 부산진일신여학교 일본인 교사의 오빠인 사카이[酒井]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1919년 3월은 김반수 등 부산진일신여학교 7회 졸업생들의 졸업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7회 졸업생들은 주경애·박시연 두 교사의 출옥을 기다려 이듬해인 1920년 봄에 8회 졸업생들의 졸업식을 먼저 치른 뒤에 두 교사와 함께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김반수는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고,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금서공립보통학교와 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동 효성여자보통학교에서 약 3년 간 교사로 재직하였다. 2001년 12월 2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