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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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明施 |
영어음역 | Yi Myeongs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정공단로17번길 17[좌천동 768-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경숙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명시(李明施)는 1919년에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1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학생 대표가 내려와 서울의 만세 시위를 알리며 독립 선언서를 전달하고 시위를 벌릴 것을 종용하였다. 이명시는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인 박시연(朴時淵)·주경애(朱敬愛)의 지휘 아래 부산진일신여학교 고등과 4학년 김반수(金班守)·심순의(沈順義)·김복선(金福善)·김봉애(金奉愛), 고등과 3학년 김응수(金應守), 고등과 2학년 김난줄(金蘭茁)·김신복(金新福), 고등과 1학년 송명진(宋明進), 학년 미상 김순이(金順伊)·박정수(朴貞守) 등과 더불어 시위 항쟁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11일을 시위 일자로 정하고 태극기 100여 장을 만들어 준비하였다.
3월 11일 이명시는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과 더불어 좌천동 일대에서 만세 시위를 벌리고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부산진일신여학교의 만세 시위는 부산 지역 3·1 운동의 효시로, 일제 조선 침략의 교두보 역할을 하며 개발되었던 부산 지역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민족 모순이 가장 첨예한 현장이 되었음을 드러내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이명시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 받고 복역하였다.
출감 후 복학하여 1922년 3월에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6월 부산진일신여학교 선배[고등과 1회 졸업생]이자 독립운동가인 박덕술(朴德述)이 부산여자청년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자, 같은 학교 졸업생인 김난줄·박정수와 함께 위생부에 속하여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