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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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法麟 |
영어음역 | Gim Beoprin |
이칭/별칭 | 법윤(法允),범산(梵山),김진린(金振麟)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호는 범산(梵山). 본명은 김진린(金振麟)이고, 출가하여 법명을 법윤(法允)에서 법린(法麟)으로 개명하였다. 김녕 김씨 충의공파 집안이다. 아버지는 김정택(金玎宅)이고, 어머니는 김악이(金岳伊)이다. 아버지 이름이 족보에는 김형상(金炯相)으로 되어 있어 제적 등본의 김정택과 다르다.
[활동 사항]
김법린(金法麟)[1899~1964]은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상북도 영천군 신녕면 치산리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신녕공립보통학교 졸업하였다. 몰락한 집안 형편 탓에 1913년 팔공산 은해사(銀海寺)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914년에 부산 범어사(梵魚寺) 명정학교(明正學校)로 왔다. 명정학교는 1906년 범어사 내에 설립된 불교계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다. 범어사 명정학교 재학 시절에 국어학자 권덕규(權悳奎)와 독립투사 서상일(徐相日)의 영향을 받았다.
범어사는 명정학교 졸업생을 서울 휘문의숙에 유학 보냈다. 김법린도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다시 불교중앙학림에 편입하였다. 불교중앙학림에서 한용운(韓龍雲)과 첫 인연을 맺었다. 한용운이 창간한 잡지 『유심(惟心)』의 편집을 거들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김법린은 1919년 2월 28일 밤 10시경 한용운에게서 3·1 독립 선언서를 배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범어사 의거 담당 지방 파견원으로서 동지 김상헌(金祥憲)과 함께 3월 4일 범어사 청련암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범어사의 허영호(許永鎬)·김상호(金尙昊)·김봉환(金奉煥)·차상명(車相明) 등과 함께 범어사 불교전문강원과 범어사 지방학림, 명정학교의 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 운동을 벌이기로 하였다. 범어사가 중심이 되어 3월 18일 동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시위에 이용할 태극기, 선언서, 격문 등을 치밀하게 준비하였고 32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3월 18일과 19일의 범어사 학생들의 역사적인 의거가 일어났다.
김법린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19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5월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김대용(奈大錯)과 함께 국내에 파견되었다. 이후 만주로 가서 안동현 육도구에 동광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활동하였다. 해외 독립운동 소식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리기 위해 김상헌, 김상호, 신상완(申商玩), 백성욱, 김봉신 등과 함께 『혁신 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또한 한국 독립의 타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내 독립운동 사료를 수집하라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밀명을 받고 국내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학업의 길로 들어서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23년 11월 파리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중 1927년 피압박 민족 대회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다. 1928년 1월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을 떠난 지 8년 만에 귀국하였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 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불교 유신 운동과 불교 청년 운동, 조선 불교 선교 양종 승려 대회(朝鮮佛敎禪敎兩宗僧侶大會) 등 불교계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5월에 조직한 강렬한 항일 비밀 결사 만당[卍黨]에도 참여하였다. 1933년부터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의 다솔사(多率寺)를 비롯하여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해인사(海印寺), 범어사 등에서 강의하였다.
1936년 1월 범어사 학생 의거를 주도한 후 18년 만에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허영호를 비롯한 청년 승려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의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38년 11월 비밀 결사인 만당이 일제에 발각되자 진주경찰서에 체포되어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1939년 다시 범어사로 돌아와 4년 동안 범어사 불교전문강원에서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45년 1월 18일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출옥해 범어사에서 요양하였다.
김법린은 범어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해방 정국의 정부 수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또한 동국대학교 교수 및 이사장에 선출되어 교육계에 몸담았다. 1952년에는 제3대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1954년에 부산시 동래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64년 3월 14일 66세에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사망 1년 전에 펴낸 『내 인생 편력의 회랑에서』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삼양문화사, 1963]가 있다.
[묘소]
김법린의 묘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에 있다. 묘비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어질고 자비한 그리 둥그시더니 정의의 금강저(金剛杵)로 일제와 싸우셨고 부드러운 웃음속에는 오히려 지절(志節) 한평생 우국지성이 몸에 배시었더니 달같이 환하온 님 산넘어 기울어도 벗들의 마음 강위에 인(印)치신 뜻과 모습 갈수록 또렷하외다. 길이 비치오리다.”
[상훈과 추모]
1995년에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08년 8월에 학술지 『한국사 시민 강좌』 43호에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인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 문화·종교·언론 부문에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