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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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相琦 |
영어음역 | Gim Sanggi |
분야 | 종교/불교,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인물/종교인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나철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상기(金相琦)[1894~1952]는 1894년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범어사 지방학림에서 공부하였다. 1918년 불교중앙학림을 수료하고 범어사(梵魚寺)에 돌아와 사찰 관련 업무에 종사하며 후진을 지도하였다. 1919년 2월경 불교계의 대표로 3·1 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한용운(韓龍雲)이 범어사를 방문하여 서울의 3·1 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자, 김상기를 포함한 7인의 대표가 서울 의거에 참여하고 범어사로 돌아왔다.
김상기는 부산에서도 범어사를 기점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래 장날인 3월 18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17일 오후 범어사 경내 4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학생들의 졸업생 송별회가 열렸다. 이때 승려인 김영규(金永奎)는 축사를 한 후 이들에게 만세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다. 마침 3월 13일 동래 장날에 일어난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의 만세 운동 직후라 학생들의 사기가 충천하였다. 김상기는 여기서 김영규의 선창으로 4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친 뒤, 야음을 틈타 동래로 향하였다.
범어사를 출발하여 일본 경찰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선리(仙里) 뒷산과 동래 향교 뒷산을 넘어 이튿날 새벽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미 밀고를 받고 기습한 일본 경찰에 의해 김상기를 비롯한 범어사 3·1 운동 주동자 20여 명이 체포되어 부산감옥소에 수감되었다. 이 해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뒤 범어사로 돌아와 후진 양성을 도모하며 한시도 조국 광복을 위해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40년에는 범어사 주지가 되어 민족 운동에 더욱 전념하였다. 195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