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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의 가덕도와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을 잇는 도선의 기점. 가덕 선창은 근래까지 동력선이 운항하였지만, 과거에는 하루 1~2회 무동력선 돛배가 운항하였다. 이 가덕 선창을 통해 대항에서 잡은 가덕 대구, 눌차만의 바지락·굴, 천성의 미역, 성북의 양파 등이 인근 송정장[녹산동], 웅천장·용원장[진해]으로 실려 나갔다. 그리고 인근 오일장은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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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 일대에 있었던 매매춘 지대. 부산광역시 사상구 감전동은 일제 강점기에는 한적한 농촌이었다. 감전동 교차로의 북부산세무서 주위 일대는 샛강의 포구로 감동포라 불렸는데, 이곳은 낙동강으로 통하는 수로가 있어 배가 드나들었다. 부근에는 낙동강의 신선한 생선회를 파는 술집이 몇 채 있었는데, 경부선 초량~구포 구간 철로 공사에서 일하는 공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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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영도구 신선동과 봉래동에 있던 조선 시대 목장의 말을 검사한 곳. 고리장[環場]은 영도[옛 절영도]에 국마장(國馬場)이 있었던 사실과 관계있다. 말의 방목은 천적인 호랑이가 많은 내륙보다 섬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에 영도에는 신라 시대 이래로 국마장이 있었다. 조선 시대 마정(馬政)에는 지방의 국마장을 다스리는 기관으로 외사복시(外司僕寺)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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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읍성에 있던 조선 시대의 다리. 광리교(廣利橋)는 ‘광리(廣利)’, 즉 널리 이롭게 한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기장읍성 현청과 남문 사이에 용소골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흘러가는 큰 하천이 있었다. 이 하천으로 읍민들이 불편하였는데, 광리교가 건설됨으로써 하천을 건너는 불편을 해소할 수 있었다. 광리교는 비문에 “그 은혜 두루 미쳐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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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남구 덕천동에 있던 조선 후기 나루터. 조선 시대 금곡 동원진 나루터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 왜인(倭人)들이 드나들 때 밀무역과 잠상(潛商)들을 단속하기 위해 수검소(搜檢所)인 기찰(譏察)을 구법곡(仇法谷)에 설치하였다.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남구 덕천동 기찰 마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부산은 대일 무역의 중심 창구로서 국내외 상품 유통이 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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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에 있는 만덕 고개의 조선 시대 이름. 기비현(其比峴)은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만덕 고개의 오래된 명칭이다. 만덕사 터에 있던 사찰이 본래 기비사(祇毗寺)이었고, 이곳을 지나는 고개를 기비현이라 불렀다. 기비현, 곧 만덕 고개는 동래를 지나 구포로 가는 고개로 내륙과 해안 지방 교역의 중심지이었다. 김해 평야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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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매립된 부산광역시 강서구 봉림동에 있던 개펄. 남포(南浦)의 지명에 관련된 자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강서구 봉림동(鳳林洞)과 죽림동 사이 남쪽에 자리 잡아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남포 개펄은 강서구 봉림동과 죽림동 사이 남쪽에 자리 잡은 들판으로 개간되기 전까지만 해도 개펄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갈대가 무성하게 펼쳐져 있어 철새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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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 있던 조선 시대의 다리. 대천교(大川橋)가 있던 곳은 조선 시대 동래 온정(溫井)이 있었다. 동래읍에서 온정으로 가려면 온천천을 건너가야 하였다. 대천교는 동래읍에서 온천천을 넘어 온정으로 갈 때 이용되던 다리이었다. 온천천은 동래읍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천(西川)이라고도 하고, 동래의 가장 중요한 하천이라고 하여 동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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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던 고대 왜장 가츠라기 소츠히코[葛城襲津彦]가 진을 친 곳.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왜에 볼모로 간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을 구출하고 왜인에게 살해되자, 왜는 탈출한 미사흔을 잡으려고 왜의 장수 가츠라기 소츠히코를 보내었다. 소츠히코가 대한 해협을 건너 다다른 곳이 타타라노츠[도비진(蹈鞴津)]이었다. 실성 이사금이 복호와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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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조선 시대 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정찰하고 탐색하던 곳. 백록대(白鹿臺)는 조선 시대 때 백산(白山) 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산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뒷산으로 해발 고도 129.5m의 화산암인데, 백록대는 백산의 허리가 바다로 빠져 들어가는 바위 반석으로 이루어진 자리이었다. 주위 경관을 바라보기에 빼어난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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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던 조선 시대의 다리. 범천(凡川)은 부산진성(釜山鎭城) 동편으로 흐르는 하천으로 지금은 동천(東川)이라고 한다. 이곳을 범천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인근의 울창한 산에 서식하던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였기 때문에 ‘범내’라 하였고, 이를 범천 또는 ‘호천(虎川)’이라고도 하였다. 범천에 세워진 다리라 하여 범천교(凡川橋)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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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조선 후기 자연 마을. 보리진으로 부르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포이진(包伊鎭)·포이포(包伊浦)에서 보리전, 보리진으로 음이 변하였다는 설과 보리를 팔던 전(廛)과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보리전에서 보리진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전자에서 말하는 포이진은 임진왜란 이후 경상북도 장기현에 있던 포이포 만호영이 이곳으로 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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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던 조선 시대 다리. 수계교(繡溪橋)는 조선 후기 기장읍성의 남문에서 동헌·객사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는 다리이었다. 수계교라는 명칭은 1870년(고종 7) 『기장읍지(機張邑誌)』에 비로소 나타나므로 19세기 후반에 불렸던 지명이다. 이전에는 광리교, 수각 다리, 홍교 등으로 불렸다. 1855년(철종 6) 현감 장유풍(張遺豊)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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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동래현에 있던 옛 지명. 오해야(吾海也)는 ‘외양간’의 이두식 표기이고, 항(項)은 길목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해야항(吾海也項)은 ‘외양간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이다. 그 위치는 오해야 목장과 봉수의 지리적 요소를 고려하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의 표기와 달리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사하구 괴정동·감천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오해야항의 오해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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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 일대를 가리키는 삼국 시대 이름. 장토지야(張吐之野)는 삼국 시대 군영(軍營)의 놀이 문화 중 하나인 마상(馬上) 기예(技藝)뿐 아니라 신라의 주변 소국에 대한 정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는 고지명(古地名)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 열전(居道列傳)에 나오는 장토지야라는 지명은 여타 다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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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다리. 탄천(灘川)은 우리말로 ‘여울천’이고, 지금의 석대천과 온천천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원동교를 여울 다리라 하였다. 따라서 이 여울 다리를 탄천교(灘川橋)라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탄천교가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1740년(영조 20) 제작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동래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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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 있던 소나무 숲. 태정대는 현재 기장 지역의 개발로 사라지고 없다. 현재 이곳에 동부 근린공원[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437번지]이 조성되면서 태정대 복원이 논의되고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60]에 신라의 태종 무열왕이 동래에 온천 목욕을 하러 올 때 임금이 탄 어가가 이곳에서 멈추어 쉬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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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양정1동의 동래 정씨 시조 묘 앞을 지날 때 말에서 내려 머물라는 의미를 담은 지명. 말이 주요한 교통수단이 되던 전근대 시기에 말을 타고 지나갈 때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의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고, 말에서 내려 머무는 곳을 하마정(下馬停)이라고 하였다. 1413년(태종 13) 종묘(宗廟)의 궐문 앞에 표목을 세웠는데, 뒷날 비석을 세워 하마비라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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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4동 일대를 조선 후기에 일컬었던 지명. 영남 대로(嶺南大路)의 종착 고을인 동래 도호부에서 여러 갈래의 지선(支線)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중 가장 많이 통행한 길은 다대포로(多大浦路)로, 1872년(고종 9) 조정에서 마지막으로 제작한 군현 진도(郡縣鎭圖)에서는 동래읍성에서 다대포까지 50리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길은 동래읍성~세병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