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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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 |
영어의미역 | Borij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신명호,김강식 |
[정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조선 후기 자연 마을.
[명칭 유래]
보리진으로 부르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포이진(包伊鎭)·포이포(包伊浦)에서 보리전, 보리진으로 음이 변하였다는 설과 보리를 팔던 전(廛)과 관련지어 설명하면서 보리전에서 보리진으로 바뀌었다는 설이다. 전자에서 말하는 포이진은 임진왜란 이후 경상북도 장기현에 있던 포이포 만호영이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생긴 명칭이다. 이후 1751년(영조 27) 경상 좌수영에 칠진 체제가 확립되면서 포이진에서 보리진으로 지명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후자는 수영 지역에 전해 오는 “보리 양식 지고 매 맞으러 간다”는 속담에서 유추할 수 있다. 경상 좌수영에서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좌수영으로 갈 때마다 이곳에서 먹을 보리쌀을 짊어지고 갔다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곤장 맞는 날짜가 앞당겨져 일찍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남은 보리쌀을 지금의 수영교 근방에서 팔고 가기 위해 보리전을 벌여 보리전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보리진 마을은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에 있던 자연 마을로,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구전에 따르면 300여 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덕민동(德民洞)이라 하였다. 1904년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慶尙南道東萊郡家戶案)』의 기록에 남상면 관내에 덕민동이 보인다. 당시 이곳의 호수는 22호이었다. 이 가운데 김(金)씨가 5호, 박(朴)씨가 3호, 강(姜)씨가 3호이었다. 1917년 간행된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에 의하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부산부 용주면(龍珠面)의 덕민동과 평민동이 합하여 동래군 남면 민락동이 되었다.
광복 이전까지는 어업을 주로 하고, 약간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는 어촌 마을이었다. 1910년 5월 간행된 『한국 수산지(韓國水産志)』 2집에 “덕민동은 남상면에 위치한 주요한 어촌으로 인가는 32호이었다.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며 주로 지인망 어업[연안에서 어망으로 물고기를 포획하여 해변으로 예인하여 어획하는 것]을 행하였다. 이곳에 어장은 5개가 있었다.
매년 일본인에게 대여하였고, 일본인은 이 어장에 호망(壺網)[승망의 일종. 길그물과 포위망 및 각진 곳에 부착한 원추형 자루그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통 정치망을 부설할 수 없는 조류가 강한 장소나 수질이 탁한 만의 안쪽에 부설하여 연인성 어족을 어획하는 어구]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보리진 마을은 이후 1957년 구제(區制)가 제정되면서 동래구, 1975년 남구, 1995년 수영구에 편입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지금의 부산 도시 철도 2호선 민락역에서 백산 쪽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민락동과 옛 수영 비행장[현 센텀시티]을 연결하는 수영교 부근, 수영 현대 아파트 단지 주변을 가리킨다. 부산광역시에서 최근 제작 발행한 「부산 도로 지도」에 보면, 수영 교차로에서 해운대 방면으로 가는 수영교에 못 가서 백산 아래쪽 민락동 어귀 부근을 ‘보리진’이라 표기하고 있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에 “포이포는 부의 남쪽 10리에 있다. 수군만호가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 옮겨 왔다[包伊浦 在府南十里 有水軍萬戶 竝壬辰亂後移來]”라고 기록되어 있고, 「1872 군현 지도 경상 좌수영 영지 도형(1872郡縣地圖 慶尙左水營營址圖形)」에는 대백산 아래의 수영천 쪽으로 포이진이 그려져 있다.